“김정은 ‘두 개의 조선’론은 흡수통일·정권붕괴 회피 전략”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북남관계는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2023년 12월26~30일, 노동당 중앙위 8기9차 전원회의)라는 선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 지향 특수관계”라 규정한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12월13일) 서문의 정신을 부인하는 “대남 부문에서 근본적인 방향 전환” 선언이어서다. 김 총비서의 ‘두 개 조선’(Two Korea)론은, 날로 나빠지는 한반도 정세와 국내 정치적 수요를 고려한 특유의 적대적 수사를 걷어내면 탈냉전기 북쪽이 지속적으로 우려해온 ‘흡수통일’을 피하려는 방어적 전략이라고, 남북관계에 오래 관여해온 여러 원로 전문가들은 1일 한겨레에 설명했다.
사실 김 총비서의 두 국가론은 예상 밖의 돌출 선언이 아니다. 2012년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분리 전략의 전면적 공식화다. 첫 걸음은 북쪽의 표준시간을 30분 늦춘 ‘평양시간’(2015년 8월15일 시행)이다. 분단 이후 늘 같던 한반도의 시간을 남과 북으로 분리한 ‘평양시간’은 반통일의 제도적 장벽이다(평양시간은 2018년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직후 철회됐다).
김 총비서의 ‘두 개 조선’ 지향 2탄은 2017년 11월 노동신문에 처음 등장해 2021년 1월 노동당 8차 대회에서 공식 선포된 “우리 국가제일주의”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의 ‘우리 민족제일주의’의 민족을 국가로 대체한 사실이 중요하다. 김 총비서가 “애국으로 단결”을 이번 전원회의의 “기본사상”으로 강조한 사실과 맥이 닿는다.
김 총비서는 노동당 8차 대회에서 “통일이라는 꿈은 더 아득히 멀어졌다”며 ‘두 개 조선’ 지향을 1차 공식화했다. 그는 8차 대회 연설에서, 이전 노동당대회 땐 늘 별도로 강조돼온 대남정책을 대외정책에 묶어 발표하는 방식으로 남북관계의 위상을 낮췄다. 노동당 규약도 고쳐 이전의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 과업 수행”,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따위의 문구를 삭제해 북쪽의 ‘남조선혁명’ 전략을 사실상 폐기하고 전통적 ‘민족 중시’ 기조를 흩트렸다.
2022년 5월 남쪽에서 윤석열 정부가 집권한 뒤 김 총비서의 ‘분리 전략’이 속도를 냈다. 지난해 7월1일 ‘외무성 김성일 국장 담화’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금강산 지역 방문 신청을 거부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가관계로 여기지 않아 온 남북 인적 왕래에 ‘외국’을 상대하는 외무성이 나서 “입국 거부”를 밝힌 건 전례 없는 일이다. 김 총비서가 연말 전원회의에서 지시한 “당중앙위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사업 부문의 기구들을 정리·개편하기 위한 대책”을 두고, 통일전선부를 포함한 당·정의 대남기구를 외무성 등에 통폐합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실제 최선희 외무상이 1일 김 총비서의 지시를 이행하려고 “리선권 동지를 비롯한 대남관계부문 일군들이 참가“한 협의회를 열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 총비서는 남쪽의 “‘흡수통일’ ‘체제통일’ ‘정권붕괴’ 기도”를 연말 전원회의 “두 적대 국가 관계” 선언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는 “지금까지 괴뢰정권이 10여차나 바뀌었지만 ‘자유민주주의체제하의 통일’ 기조는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며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당의 존엄 사수, 국위 제고, 국익 수호”를 대외사업 부문의 ‘원칙’으로 내밀었는데, “당의 존엄”이란 “사회주의 대가정의 자애로운 어버이”라 불리는 김정은 자신을 포함한 이른바 ‘백두혈통’을 뜻한다. 결국 알짬은 ‘흡수통일·정권붕괴’ 회피다. 김일성 주석이 1988년 1월1일 신년사에서 ‘흡수통일’ 반대를 공식 제기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북쪽의 걱정거리다.
아울러 김 총비서는 “‘전쟁’이라는 말은 이미 우리에게 현실적인 실체”라며 “핵위기 사태에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와 “핵에는 핵으로, 정면대결에는 정면대결로”라고 강경 기조를 강조했다. 이는 2016년 5월 노동당 7차 대회 때의 “정의의 통일대전”, 2022년 12월 노동당 중앙위 8기6차 전원회의의 “강 대 강, 정면승부” 기조의 재확인에 가깝다. 1950년 김일성의 공격적 무력통일 노선과 맥락이 다른 ‘방어적 공격성’의 표현이다.
김 총비서의 ‘두 개 조선’ 지향과 ‘핵전쟁 불사’ 엄포를 두고 흡수통일·체제붕괴를 피하려는 ‘고슴도치식 농성전략’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총비서는 한국과 미국에 문을 닫고 ‘장기 농성전’으로 일관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김 총비서와 시진핑 중국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1일 주고받은 축전에서 북·중 수교 75돌인 2024년을 “조(북)·중 친선의 해”로 선포했다는 노동신문의 보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 총비서는 축전에서 “모든 분야에서 교류와 내왕을 긴밀히 하고, 공동 투쟁에서 협동을 보다 강화”하자고, 시 주석은 “전략적 신뢰를 두터이 하고, 교류와 협조를 증진”시키자고 했다. 북중 관계에 밝은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올해 김정은의 중국 방문과 같은 북중 정상외교가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 총비서가 2023년 9월 북·러 정상회담에 이어 2024년엔 북·중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뒷마당’ 다지기에 공을 들이리라는 전망이다.
문제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악화하는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김정은이 ‘두 개 조선’을 주장하더라도 우리는 꽉 막힌 남북관계를 풀고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의 길을 열 새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면서도 ”무엇보다 당장의 급선무는 남과 북의 무력 충돌을 방지할 대화 창구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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