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해 밝히는 한국과학]② 美에서 사기로 끝난 ‘피 한 방울 암 진단’, 한국이 해냈다
혈액 4~10마이크로리터로 전립선암 진단 성공
다양한 배경지식과 상용화 경험 등이 큰 도움 돼
2024년엔 AI·로봇공학 접목 ”조만간 상용화 성과 나올 것”
지난 5월 미국 진단기기 회사 테라노스를 이끌던 엘리자베스 홈즈 전 최고경영자(CEO)가 텍사스 브라이언 교도소에 수감됐다. 2014년 피 몇 방울로 100가지 질병을 진단하는 키트 ‘에디슨’을 개발했다고 발표한 지 9년 만의 일이다.
홈즈가 창업한 미국 의료검사 스타트업 ‘테라노스’의 기업 가치는 한때 90억달러(11조6100억원)까지 올랐다. 하지만 2015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에디슨이 진단할 수 있는 질병은 16종에 불과하다고 폭로하면서 홈스는 ‘여자 스티브 잡스’에서 사기꾼으로 전락했다. 테라노스의 기업가치 역시 제로가 됐다. 여성 ‘스티브 잡스’라고도 불렸던 그녀는 불과 10년을 가지 못하고 실리콘밸리 희대의 사기꾼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끝냈다.
홈즈 사건으로 바이오 업계는 큰 후폭풍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수 많은 과학자들은 ‘피 한 방울’을 활용한 진단키트 개발을 계속했다. 일련의 소동으로 오히려 진단키트에 대한 파급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쟁의 한 복판에 조윤경 울산과학기술원(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겸 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연구단 그룹리더 연구진이 있었다. 조 교수 연구진은 작은 칩 위에 실험실로 불리는 ‘랩온어칩’ 기술로 혈액 한 방울로 암을 진단하는 장치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2023년 12월 울산 울주군 UNIST 캠퍼스에서 만난 조 교수는 홈즈 사건을 언급하며 “피 한 방울로 질병을 진단한다는 표현은 한 방울의 기준이 명확지 않아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연구실에서 개발한 칩은 일반적인 피 한 방울인 4~10마이크로리터(㎛) 정도의 피로 암을 진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랩온어칩은 말 그대로 연구실의 실험기기를 작은 크기의 칩에 구현하고 자동화한 것을 말한다. 시료만 넣으면 누구나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어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이후 진단 분석 기술 큰 인기를 끌었다. 조 교수는 여기에 다공성 금 나노 전극 기반 바이오센서를 넣어 혈액 속의 암 표지자(종양세포에서 생성되어 분비되거나 종양조직에 반응해 정상조직이 생성하는 물질)를 감지하고 전립선암을 진단하는 데 성공했다.
일반적인 혈액이나 소변에는 질병에 관련된 바이오마커가 굉장히 적게 들어있다. 따라서 혈액 내의 다양한 성분에서 원하는 바이오마커만 얻기 위해서는 전처리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쳐야 한다. 현재 대형 의료시설이나 실험실에서만 분석이 가능할 정도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이에 조 교수는 센서 전극의 표면적을 높여 민감도를 개선했다. 현미경으로 보면 표면에 작은 ‘브로콜리’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모양이다. 표면적이 커질수록 오염 속도도 빠르다는 한계가 있으나 전극에 나노미터 크기의 구멍을 만들어 이를 방지했다. 그 결과 복잡한 분리정제 절차 없이 혈장과 소변에서 암세포에서 유래한 엑소좀에 붙은 단백질을 검출해 전립선암 환자를 구별해낼 수 있었다. 엑소좀은 디옥시리보핵산(DNA)이나 리보핵산(RNA), 단백질 조각 같은 생체분자를 세포 안팎으로 나르는 소포체다.
조 교수는 세계적인 랩온어칩을 개발한 데에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탄탄한 배경지식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박사과정 동안 고분자 물리를 전공했다. 그러다 삼성에 스카우트되어 생물 관련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조 교수는 “삼성이 DNA 칩을 개발한다고 해서 그때 생물 관련된 공부를 했다”며 “기본이 없었지만 오히려 지금까지 배운 다양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각을 갖고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UNIST에 부임하기 전 쌓은 상용화 경험도 한몫했다. 조 교수는 삼성종합기술원에서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일하면서 DNA를 증폭하는 중합효소 연쇄 반응(PCR) 기기를 상용화했다. 이후 UNIST로 자리를 옮겨 바로 상용화할 수 있을 정도의 랩온어칩을 만들었다.
이전까지 랩온어칩 연구라 하면 모듈이나 센서 개발을 뜻했다. 시료 처리가 복잡할뿐더러 모듈 하나를 만들더라도 펌프나 칩 외에 다른 장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 교수가 시료 전처리부터 분석까지 모든 모듈을 넣은 랩온어칩을 개발하면서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를 계기로 조 교수는 진정한 랩온어칩을 개발했다는 평을 받으며 세계적인 랩온어디스크 분야 석학으로 인정받았다.
조 교수는 UNIST에서 쌓은 연구 성과 중 ‘패스트(Fluid Assisted Separation Technology·FAST)’ 기술이 랩온어칩 성능을 크게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FAST는 소변이나 혈장, 혈액에서 크기별로 세포를 분리하는 필터 기술이다. 필터 아래쪽에 항상 물을 채워두고 이 물이 ‘마중물’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혈액 등이 필터 전면에서 고르게 걸러지는 원리다.
마치 커피를 내릴 때 필터와 원두 가루를 물로 고르게 적셔 원액이 고르게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분리 효율을 높일 뿐 아니라 혈구세포나 혈관 내를 순환하는 종양세포(CTC)를 손상없이 얻을 수 있다. 조 교수는 “필터 능력이 그때그때 달랐는데, 그 원인을 집요하게 찾았던 것이 유효했다”며 “많은 학생과 함께 고민한 끝에 훨씬 더 적은 힘으로 필터 능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조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2019년 현장진단용 미세칩 전자동 밸브제어 기술을, 2022년에는 살아있는 세포 간 정보 전달체인 엑소좀을 융합한 인공 세포 소기관을 개발한 공로로 국가연구개발(R&D) 우수성과에 이름을 올렸다. 2023년 국가연구개발(R&D)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된 ‘혈액 한 방울로 암을 진단하는 기술’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실시한 대국민 온라인 투표에서 국민들의 체감도가 높은 성과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박사 졸업 후 연구를 이어온지 25년 가까이 지났지만 조 교수는 “여전히 연구가 재미있다”며 “매일 행복하고 신나서 그런건 아니지만 연구가 삶 자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024년에는 혈액뿐 아니라 타액 등 시료를 분석하는 진단 칩을 개발할 계획이다. 조 교수가 속한 첨단연성물질연구단에 바르토슈 그쥐보브스키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 그룹리더 겸 UNIST 특훈교수가 새 단장으로 오면서 AI 알고리즘과 로봇공학을 연구에 접목하는 시도도 이어갈 예정이다.
조 교수가 개발한 기술은 언제 상용화가 될까. 그는 “논문 쓴 건 많은데 상용화한건 많지 않다”며 “최근 개발한 엑소좀 분리 기술로 질병 진단이나 모니터링이 가능해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른 시일 내에 연구가 상용화된다면 질병을 더 정밀하고 정확하게 진단해 예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환자 누구나 개인에게 맞는 개인 맞춤형 옵션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미 일부에서 상용화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조윤경 UNIST 교수 겸 IBS 그룹리더는
1988~1992년 포스텍 화학공학 학사
1992~1994년 포스텍 화학공학 석사
1994~1999년 미국 어배너-섐페인 일리노이대(UIUC) 재료공학 박사
1999~2005년 삼성종합기술원 책임연구원
2006~2008년 삼성종합기술원 수석연구원
2008년~현재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
2015년~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연구단 그룹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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