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노동자 착취’ 가리는 미국 팁 문화… 환상 깨기 ‘성장통’ [워싱턴 아나토미]

권경성 2024. 1. 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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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손님에게 임금 받는 미국 팁 노동자
3000원 못 미치는 미 식당 종업원 최저시급
코로나발 팁플레이션에 “못 주겠다” 백래시
막상 ‘임금인상법’ 시행되자 노동자도 “불안”
편집자주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지난달 27일 찾은 미국 워싱턴 남서부 포토맥 강변 워프 구역 내 멕시코 요리 프랜차이즈 식당 ‘미비다’의 종업원 대니얼(맨 오른쪽)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워싱턴시의 ‘주민발의안 82호(Initiative 82)’가 자영 식당에 가하는 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3.5%의 수수료를 계산서에 추가했습니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남서부 포토맥 강변 워프 구역. 수산시장을 중심으로 관광지처럼 개발된 시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다. 멕시코 요리 프랜차이즈 식당인 ‘미비다(Mi Vida)’가 자리 잡은 곳은 강이 잘 보이는 목 좋은 길가였다.

홀 종업원(server) 대니얼이 갖고 온 메뉴판 하단에는 음식값에 일정 비율 서비스료가 붙는다고 안내돼 있었다. “팁과는 다른 것이냐”고 물었다. 대니얼은 친절했다. “전부 하우스(가게)로 가니까 다르기는 하죠.” 반드시 종업원에게 주도록 법으로 규정돼 있는 팁과 달리 이 요금은 고용주가 원하는 용도로 쓸 수 있다. “3% 남짓이면 적은 편이에요. 100달러(약 12만9,000원)어치를 먹어도 3.5달러(약 4,500원)만 더 내면 되는 거니까요. 6% 넘는 수수료를 붙인 식당도 많아요.”


‘서비스료’가 등장한 까닭

발의안 82호는 팁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2027년까지 일반 노동자 최저임금과 똑같게 만든다는 내용의 법안이다. 2022년 11월 시의회를 통과했고, 지난해 5월부터 시행돼 오고 있다. 연초 5.35달러(약 6,900원)였던 시급이 법 시행 직후 6달러로 올랐고, 7월부터는 8달러가 적용됐다. 대니얼이 받고 있는 최저시급도 8달러다. 제법 올랐다. 팁도 줄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발의안 82호의 수혜자다.

지난달 27일 찾은 미국 워싱턴 워프 구역 내 멕시코 요리 프랜차이즈 식당 ‘미비다’의 메뉴판. 하단에 “시의 발의안 82호(팁 노동자 최저임금 단계 인상)가 자영 식당들에 가한 영향을 상쇄하느라 계산서에 3.5% 수수료를 붙였다”고 적혀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네바다, 오리건, 워싱턴 등 주로 서부에 몰린 8개 주(州)를 제외한 나머지 42개 주의 경우, 식당 종업원 등 서비스 노동자의 임금은 팁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책정된다. 급여와 팁을 합산해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식이다. 일반 노동자(연방법 기준 7.25달러)보다 팁 노동자(2.13달러)의 최저시급이 훨씬 적은 까닭이다. 대다수 미국 팁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받는 시간당 임금이 한국 돈으로 3,000원에도 한참 못 미친다.

연방이 정한 금액은 하한선 성격이다. 주별 임금 체계에는 해당 주의 사정이 반영된다. 현재 워싱턴시 일반 노동자 대상 최저시급은 17달러다. 팁 노동자(8달러)와 아직 거리가 멀다. 그래도 고용주 입장에서는 가파른(반년여 만에 약 50%) 인건비 인상폭이 버겁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손님이 확 줄고 물가는 껑충 뛰었다. 서비스료는 고육책이라는 게 식당 측 호소다. 미비다 관계자는 지난해 7월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에 “돈을 벌려는 의도가 아니라 피해를 만회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팁 노동자 최저임금이 전액 보장되지 않는 이중 구조가 노동운동의 과녁이 된 게 최근 일은 아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곳이 시민단체 ‘원 페어 웨이지(One Fair Wage·OFW·하나의 공정임금)’다. 지난해 5월 미국 유명 영화배우 수전 서랜던(77)이 뉴욕주 알바니 주의사당 앞에서 “팁 노동자에게 완전한 최저임금을 보장하라”며 시위를 벌이다 붙잡혀 화제가 됐을 때 그가 참여한 시위를 주도한 단체가 OFW였다.

성과도 있다.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시카고의 시의회가 지난해 6월 팁 노동자도 일반 노동자와 같은 수준의 최저임금을 받도록 법을 개정했다. OFW에 따르면, 8개 주가 팁 최저임금제 폐지 입법을 진행 중이고, 다른 4개 주도 투표 절차를 밟고 있다.


팁 깎일라… 성희롱도 감내

시민단체 ‘원 페어 웨이지(OFW·하나의 공정임금)’ 사루 자야라만(가운데) 의장이 2022년 2월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팁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전액을 지급하는 식당을 구제하라고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노동운동 진영이 꼽는 이원적 최저임금 제도의 문제점은 우선 팁 노동자의 빈곤이다. 미국 민주당 계열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가 2021년 3월 공개한 보고서 ‘팁 최저임금 폐지가 빈곤과 불평등을 줄인다’를 보면, 요식업 등 팁 의존도가 높은 산업군 노동자의 빈곤 상태 비율은 단일 최저임금 체계를 갖고 있는 주의 경우 10.2%였다. 반면 팁 노동자에게 연방 수준(2.13달러) 최저 시급만 보장하는 주로 가면 빈곤 비율은 13.8%로 올랐다.

수입 불안정과 부당 처우도 팁 노동자 최저임금 인상이 필요한 이유다. CAP 보고서는 “팁이 수입의 4분의 3을 넘으면 노동자의 생계가 고객 변덕에 지나치게 취약해진다”며 “이런 권력 불균형 상태에서 여성, 유색인종 등 약자 계층은 온갖 불의와 차별마저 견뎌야 한다”고 지적했다. 팁 노동자의 70%에 달하는 여성이 손님의 성희롱과 성추행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기형적 임금 구조 탓이 크다는 게 보고서의 설명이다.

팁 최저임금은 애초 고용주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된 제도다. 종업원 임금 일부를 고객에게 떠넘기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남북전쟁이 끝난 뒤 해방된 흑인 노예 노동력을 저임금으로 착취하려는 서비스 업종 고용주의 불순한 의도가 팁 노동의 단초다.

물론 안전장치를 두고 있기는 하다. 팁을 합쳐도 최저임금에 모자란다면 고용주가 부족분을 충당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기가 부담해야 할 비용을 손님에게 전가하는 구조여서 고용주 입장에서는 혜택이다. ‘팁 크레디트’라 부른다.

10년간 미국 워싱턴시 노동자 최저임금 추이. 그래픽=김대훈 기자

문제는 이를 강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팁 수입을 정확하게 산정하기 어렵다. 공유 관행 때문이다. 홀에서 고객을 상대하는 종업원들은 통상 자기가 받은 팁을 주방 종업원처럼 고객과 분리된 동료들과 나눌 때가 많다. 그런데다 부당해 보이는 고용주의 계산에 종업원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팁 규모를 좌우하는 테이블 배정이 고용주 권한이어서다.

코로나19 대유행 뒤 미국은 '팁플레이션(팁+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시끄럽다. 서비스 업계가 인력난에 직면했고, 인플레이션으로 비용이 불어난 상황에서 고용주로서는 인건비를 늘릴 여력이 없었다. 이에 떠올린 궁여지책이 고객으로부터 더 많은 팁을 끌어내는 방안이었다. 기본적으로 음식 가격의 15% 수준이던 팁 하한선을 20% 위로 끌어올렸다. 코로나19 시기 대면 접촉 축소 추세에 올라타 급속히 보편화한 ‘태블릿 결제’ 장치를 활용, ‘디지털 팁’ 요구 빈도도 늘렸다.


노동자·손님 모두 뿔났다

고용주 과욕은 고객 저항을 불렀다.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팁 백래시(반발)가 시작됐다”며 “너무 흔해진 팁 요구에 짜증 난 사람들이 팁을 줄이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미국 급여 지불 소프트웨어 업체 구스토가 30만 개 중소 서비스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11월 기준 미국 서비스 노동자가 받은 시간당 팁 평균치(1.28달러)가 1년 전(1.38달러)보다 7%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팁 문화에 대한 환멸로까지 번지는 모습이다. 사루 자야라만 OFW 의장은 “노동자와 소비자가 모두 화내고 있다”고 WSJ에 말했다. 전근대 유럽 귀족 문화가 ‘나도 귀족처럼 베풀고 싶다’는 19세기 미국인의 허영심을 충족시켰고, 이런 환상이 잔존한 결과가 현재 미국 팁 문화라는 냉소적 분석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착오 문화가 연명한 데에는 팁이 ‘서비스 제공자의 노력과 친절에 대한 자발적 보상과 감사’나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자부심도 큰 몫을 했다.

미국 워싱턴 멕시코 요리 식당 ‘미비다’의 음식값 청구서. 팁 비율이 20%에서 시작한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워싱턴시 요식업계는 지금 성장통을 겪고 있다. 악시오스에 따르면 워싱턴수도권식당협회(RAMW)가 워싱턴 자영 식당 약 300곳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발의안 82호 시행 뒤 3분의 1 이상이 매출과 손님이 줄었고, 4분의 3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익이 감소했다. 이들의 평균 수익 감소율은 34%에 달한다.

일부 노동자도 불만이다. 워싱턴시 프랜차이즈 식당 ‘아이홉(IHOP)’ 종업원인 닉 존스는 지난달 지역 매체 디시스트 인터뷰에서 “일한 만큼 벌 수 있어 좋다”며 기존 팁 노동 최저임금 시스템을 옹호했다. 지나친 시급 인상이 단골 이탈과 팁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걱정하는 팁 노동자도 상당수다. ‘더 다이너’에서 일하는 마디 케네디는 디시스트에 “주수입원은 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업계 일각에서는 정상화 흐름 속 과도기적 진통인 만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팁 노동자 최저임금 인상을 지지해 온 프랜차이즈 식당 ‘버스보이와 시인(Busboys and Poets)’의 최고경영자 앤디 샬랄은 악시오스에 “당장 변화는 고통스러운 법”이라며 “사람들이 산업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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