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효의 '좋은 축구론'…"구단도 감독 뒤에 숨기만 해선 안 돼"
구단 '비전' 보고 재계약…"지방·시민 구단 광주엔 골 넣는 축구 필요"
(서울=연합뉴스) 이의진 기자 = 프로축구 K리그1 광주FC 이정효 감독의 별명은 '한국의 모리뉴'다.
상대 감독의 전술, 전략을 직격하는 인터뷰 스타일이 유럽 축구 대표 명장 조제 모리뉴 AS 로마(이탈리아) 감독과 비슷해 K리그 팬들이 이런 별명을 붙였다.
인터뷰만 닮은 건 아니다. 이 감독은 모리뉴 감독처럼 눈에 띄는 선수단 장악력과 지도력도 보여줬고, 구단 사상 최고의 성적을 견인했다.
16승 11무 11패로 2023시즌을 3위로 마친 광주는 2024-2025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플레이오프(PO) 무대도 밟게 된다.
독특한 스타일과 놀라운 성과에 축구계는 이 감독이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준 지도력과 카리스마에 주목한다.
하지만 지금 이 감독의 시선은 '그라운드 밖'으로도 향한다. 광주FC가 1부 잔류라는 근시안적 목표를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으로 자리 잡을 비전을 그리고 있어서다.
그는 감독이 담당하는 선수단을 넘어 구단 전체를 지탱하는 '튼튼한 시스템'이 정착돼야만 한 이런 목표가 가능하다고 본다.
"언제까지 구단이 감독 뒤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는 거잖아요."
이 감독은 최근 연합뉴스와 만나 구단의 역할을 놓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감독이 보기에 명문 팀이 되려면 전술, 전략, 선수단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만으로는 부족하다.
총 다섯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게 이 감독 지론이다.
이 감독은 "좋은 감독, 좋은 선수, 좋은 전술, 좋은 시스템, 좋은 환경까지 5개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팀이 명문으로 성장한다"고 강조했다.
이 감독은 광주가 전력 향상을 위해 과감하게 자금을 푸는 울산 HD와 전북 현대의 길을 밟아 명문 팀이 되기는 어렵다고 진단한다.
대신 그는 '광주만의 길'을 제시했다. 이 감독은 "우리는 선수를 계속 키워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계속 배출해야 한다. 정호연, 엄지성, 허율, 이순민, 이희균 등이 그 예시"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선수들을 지키면서, 잠재력 있는 선수가 성장하는 순환 구조가 중요하다. 그러려면 팀의 기본적인 뼈대가 중요하다"라며 "특정 선수가 떠나도 뼈대는 남는다. 이를 토대로 새싹 선수가 어느 정도 큰 나무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되면 이제 기존에 나무 역할을 하던 선수는 떠나도 괜찮다. 하지만 그 뼈대가 뿌리내리지 않았을 때부터 선수들이 빠지면 이 팀은 명문 구단이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뿌리내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건전하고 튼튼한 시스템이 정착되는 게 명문 구단의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 감독은 "100년, 200년, 300년을 사는 나무를 보면 뿌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뿌리가 풍부하고 깊을 때 성장하는데, 계속 뿌리가 뻗을 수 있도록 내가, 감독이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감독이 보기에 광주에는 현재 '이정효 중심 체제'가 필요하다. 사령탑으로서 그는 1군 선수단을 관리하는 일 이상의 업무를 소화하고자 한다.
이 구상에서 감독은 위로는 1군부터 아래로 유스 선수단에까지 모두 적용하는 이정효만의 축구를 개발해 광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통일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감독은 유럽 축구 명문들이 이런 방식을 채택했다고 본다. 광주가 기꺼이 자신을 중심으로 이런 운영에 나서겠다는 포부를 보여준 게 장기 계약을 맺은 이유라고 이 감독은 밝혔다.
본래 계약 기간이 2024년까지였던 이 감독은 지난달 13일 2027년까지 계약을 연장하기로 구단과 합의했다. 구단에 따르면 이는 창단 이래 최장기 감독 계약이다.
이 감독은 "구단이 내게 믿음을 줬다. 비전을 보여줬다"며 "내년 5월이면 훈련장 2개 면이 완성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내가 선수들을 마음대로 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프로팀으로서 우리가 보여주는 축구를 유소년 선수단에도 심어주겠다는 믿음도 줬다. 그래야 그 아이들이 그대로 올라와서 적응할 수 있는데, 장기적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구단이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이 감독은 "(노동일) 대표이사님과 (강기정) 광주시장님께서도 우리 함께 만들어보자고 하셨다"며 "이런 시스템이 정착되면 내가 아닌 다른 감독이 오더라도 광주만의 색깔이 유지된다. 그게 지속되면 팀이 명문 구단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만의 뼈대가 있어서 모두 가능한 일이다. 유스 선수가 성장하든, 영입을 통해 선수가 입단하든 우리 색깔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면 동화된다"며 "열심히 하지 않는 선수도 여기서는 열심히 할 수밖에 없고, 다른 방식의 축구를 하던 선수도 팀 전술에 녹아든다. 그런 환경을 만드는 역할과 책임이 내 몫"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바이에른 뮌헨(독일), 아약스(네덜란드)도 그렇고 항상 다들 공격적 축구를 한다. 맨체스터 시티(잉글랜드)도 마찬가지"라며 "이런 팀들은 모두 특정 감독 한 사람이 영향력을 크게 발휘했다"고 짚었다.
이 감독에게 최근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구단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브라이턴 앤드 호브 앨비언이다.
EPL 하위권에 전전하던 브라이턴은 그레이엄 포터 감독 체제에서 중위권 팀으로 올라섰고, 배턴을 넘겨받은 로베르토 데제르비 감독의 지휘 아래 2022-2023시즌을 구단 사상 최고 순위인 6위로 마쳤다.
K리그 2023시즌을 마치고 곧장 영국으로 떠나 브라이턴을 포함한 EPL 팀들의 경기를 관전한 이 감독은 "지금 데제르비 감독도 선수들을 공격적으로 지도하고 있는데, 그가 나가도 브라이턴은 또 공격적인 감독을 데려올 것"이라며 "그 팀은 강팀을 만나든, 약팀을 만나든 자기 축구를 잃지 않고 유지하려 한다"고 평가했다.
특히 지난달 17일 2023-2024 EPL 17라운드에서 아스널에 브라이턴이 0-2로 완패한 경기를 보고 이 감독은 확신을 굳혔다.
그가 보기에 두 팀은 모두 좋은 감독, 전술, 시스템, 환경을 갖춘 팀이다. 다만 이 네 가지 조건 외 선수 수준의 차이가 뚜렷했다고 한다.
울산, 전북과 전력 차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이 감독으로서는 이들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면 구단이 일관된 색깔을 유지하면서 발전을 꾀하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 감독은 "마르틴 외데고르(아스널) 같은 선수가 차이를 만드는 건 나머지 조건을 갖춰도 잡을 수 없다. 그래도 브라이턴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건, 이런 선수 격차에도 끝까지 자신만의 축구를 하려고 했다는 점"이라며 "그게 브라이턴이 최근 단단한 팀이 된 이유"라고 짚었다.
무엇보다 이 감독은 감독 혼자서는 팀을 이 정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적합한 감독을 찾았다면,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은 구단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독이 어떤 축구를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구단 철학도 매우 중요하다"며 "구단도 '감독이 알아서 하겠지'하는 생각으로 선임하면 안 된다. 자기 철학, 성향에 맞는 감독을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고경영자(CEO)도, 구단주도, 대표이사도 그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공격 축구냐 수비 축구냐, 성적에 관계 없이 선수를 성장시킬 것이냐 등을 미리 정해두고 운영해야 명문 구단이 된다"며 "세부적으로 보면 구단이 1부냐, 2부냐에 따라 또 내용이 달라지는 만큼 구단도, 대표이사도, 단장도 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고 책임져야 한다. 감독만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 감독은 자신이 제시한 '5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면 '좋은 축구'가 구현된다고 본다.
이 감독에게 좋은 축구란 이기는 축구가 아니라 골이 많이 터지는 축구다.
이 감독은 "광주는 승점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골을 넣기 위해 축구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며 "때때로 이기기 위해 단순한 축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득점을 위해서는 상대의 각종 전술에 모두 반응해야 한다. 그게 좋은 과정이고 좋은 축구"라고 설명했다.
골을 넣는 축구는 승리와 함께 관중을 불러온다. 지방 구단이자 시민 구단인 광주는 이런 축구를 지향해야 한다는 게 '이정효 축구론'의 결론이다.
이 감독은 "지방 팀이고 시·도민 구단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시에서 돈을 계속 받을 수는 없다. 우리 팬들이 입장료를 내고 미디어에서도 주목해주면 투자자들이 나타날 것"이라며 "구장 이름도 '광주축구전용경기장'이 아니라 기업명이 붙은 다른 이름으로 변할 거다. 이를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골을 많이 넣는 축구가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pual0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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