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불똥…미국 대학들 ‘문화전쟁’ 활활
학내 정치적 표현의 자유 한계 쟁점으로
석 달째 계속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 전쟁은 미국사회를 갈라놓았다. 그중에서도 갈등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대학 캠퍼스다. 학생들은 ‘친이스라엘’과 ‘친팔레스타인’ 진영으로 나뉘어 시위 등을 벌이며 대립했다.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들에겐 ‘반유대주의’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펜실베이니아대(유펜)는 총장의 자진 사퇴로 일단락되고, 하버드대에선 총장이 유임됐지만 논문 표절 의혹 제기 등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 내 ‘표현의 자유’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도 불거졌다. 고액 후원자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미 대학들의 실상도 드러났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진보 색채에 불만을 품어온 보수 일각에서 이참에 ‘문화전쟁’에 나섰다는 지적도 있다.
■유펜 v 하버드의 경우
지난해 12월 5일(현지시간) 미 하원 교육·노동위원회가 연 청문회에는 세 곳의 명문대학 총장이 나란히 자리했다. 엘리자베스 매길 유펜 총장, 클로딘 게이 하버드대 총장, 샐리 콘블러스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이었다.
이들은 ‘유대인 학살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발언이 대학 윤리 규범 위반에 해당하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답해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학생들의 반유대주의 언사를 분명히 규탄하지 않고 “그런 위협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면 괴롭힘이 될 것”이라며 ‘법률가적’ 태도로 발언한 매길 총장에게 공세가 집중됐다.
사실 청문회 이전부터 매길 총장은 이사회와 고액 기부자, 펜실베이니아 유력 정치인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상태였다. 하마스의 공격과 캠퍼스 내 반유대주의 시위 등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오랜 후원자이자 부호 가문인 존 헌츠먼 전 주러시아 미국 대사는 매길 총장을 겨냥해 “침묵은 반유대주의다”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매길 총장이 표현의 자유 존중을 내세워 지난해 9월 학내 팔레스타인 문학축제 개최를 승인한 것도 비판을 받았다. 당시 후원자들은 반유대주의 발언 전력이 있는 연사가 초청됐다면서 행사 취소를 요구했다. 여기에 전국에 생중계된 청문회 발언까지 겹치면서 매길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여론이 증폭됐다. 매길 총장은 공개 사과에 나섰지만, 결국 청문회 나흘 뒤 사임했다.
매길 총장이 물러나자 청문회에 함께 출석했던 게이 총장에 대한 퇴진 압박도 거세졌다. 그런데 하버드대의 처분은 달랐다. 교수들은 대학의 독립성과 학문의 자유를 위해 총장 사퇴 요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그의 유임을 결정했다.
그러자 총장 해임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헤지펀드 거물 빌 애크먼 등은 게이 총장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관련해 하원 내 공화당 의원들은 정식 조사에 나섰다. 이사회가 논문 표절 문제에서도 사실상 게이 총장 재신임을 확인하자 하버드 이사회 특유의 비밀·폐쇄적 의사결정 구조를 문제 삼는 목소리도 나왔다. 고액 후원자들의 기부 중단 행렬도 멈추지 않고 있다. 하버드 역사상 첫 흑인 총장인 게이 총장은 자리를 지켰지만, 여전히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다.
■후원자 압박에 문화전쟁 양상까지
일련의 사태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고액 후원자들의 막강한 힘이다. 특히 유대계 자본가인 후원자들은 전쟁 발발 이후 대학 내에 상당한 입김을 행사해왔다. 기부금 의존도가 높은 명문 사립 대학들의 재정 구조상 취약점이 드러났다는 평가도 나온다.
게이 총장과 각을 세우고 있는 애크먼 역시 유대계로 모교 하버드의 ‘큰 손’이었다. 그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직후부터 ‘실력 과시’에 나섰다. 전쟁 초기 하버드대 일부 학생 단체들이 하마스 공격의 책임을 전적으로 이스라엘에 돌리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자 그는 즉각 성명 참여자들의 신상 공개를 요구했다. 특히 학생들의 월가 취업을 막겠다며 ‘취업 블랙리스트’까지 공언했다. 애크먼이 게이 총장에 대한 개인적 불만으로 퇴진 운동에 앞장서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자신이 대학에 낸 수천만 달러의 기부금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상의도 없었다는 점에 분노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의회 청문회를 주도한 공화당 등 보수 진영이 반유대주의를 빌미로 대학 내 진보 담론을 겨냥해 ‘문화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보수파는 그동안 명문 대학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에 경도돼 있다고 비판하며, 성소수자, 인종차별, 임신 중단 등 첨예한 이슈에 대해서도 학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표현 규제에 힘을 실으면서 대학들을 압박하다니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반유대주의를 둘러싼 미 대학 내부의 혼란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질문들도 환기하고 있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조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혐오 등을 담은 발언의 경우에도 실질적이거나 임박한 위해가 명확할 때만 규제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 이후 학내 정치적 발언을 어디까지 허용할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판단 이전에 이해” 학문의 역할 화두로
전쟁이 촉발한 미국 대학 내 갈등이 단기간에 가라앉을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다.
이코노미스트 등 외신은 다트머스대 사례에 주목했다. 전쟁 발발 직후 이 대학은 이스라엘, 레바논, 이집트 출신 교수들이 주축이 돼 두 차례 공개 포럼을 열었다. 한쪽에 대해 섣불리 가치판단을 내리기보다 양쪽 모두의 입장과 분쟁의 복잡한 맥락을 충분히 듣고 토론해보자는 취지였다. 많아야 십수명이 참석할까 싶던 행사에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이집트의 전직 외교관이자 소설가인 에제딘 피셰레는 포럼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원합니까, 아니면 비난할 누군가를 찾으려고 합니까? 그저 분개하려 한다면 아이비리그 대학까지 올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이 누리는 것은 배움의 기회입니다.” 포럼을 공동 개최한 수새나 헤셸 다트머스대 유대인학과 교수는 “어떤 경우에도 단순한 내러티브에 만족하지 않는 법”을 학생들이 배우게 됐다고 전했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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