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無知지옥] “아직도 ‘비교우위’만 가르치는 학교… 학생은 투자·연금·보험까지 궁금해 해”
곗돈과 은행 적금이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스마트폰을 활용한 주식, 가상화폐 매매 등 투자처가 다양해졌다. 그만큼 금융 소비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정신이 바뀌지 않았다. 돈을 다루는 장사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탓에 그간 우리 사회에서 돈에 대한 얘기는 금기시됐고 금융 교육이 전무했다. 그 결과 3대 사모펀드(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및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논란, 라덕연 사태가 터졌다. 반복되는 금융 사고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어봤다. [편집자주]
“여전히 학교 수업에선 아이들에게 ‘비교우위’의 정의를 외우라고 하고, 아이들은 정의를 달달 외워 시험지에 받아적습니다. 하지만 정의를 아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할까요?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좀 더 실생활에 가까운 금융 지식입니다.”
지난달 19일 한진수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의 한 모처에서 조선비즈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 ‘금융 교육’이라는 단어를 창시한 최초의 연구자 중 한 명이다. 지난 2014년에는 한국경제교육학회와 별개의 조직인, 한국금융교육학회의 설립을 주도했다. 현재 이 학회의 회장인 한 교수는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교육협의회 의원으로 국내 금융 교육 정책 확대에 핵심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 선진국과 비슷한 교육 체계지만 속은 텅 빈 강정
한 교수는 “국내 금융 교육의 체계는 해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실제 1997년 IMF 외환위기, 2003년 카드 사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우리 정부는 금융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고, 관련해 여러 법적 장치와 체계를 만들었다. 2017년 경제교육지원법, 2021년 금융소비자보호법 등으로 정부가 책임지고 금융 교육을 지원할 법적 근거가 마련됐고, 학계의 활발한 연구로 국내 출간된 교재와 교육 프로그램도 해외 선진국에 버금가는 수준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내실(內實)이다. 그는 “금융 교육의 외형은 충분히 커졌지만, 내실화는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 초·중·고등학교에서의 금융 교육 대부분은 외부 강사를 초청해 진행하는 강연으로 이뤄진다. 외부 강사들은 금융감독원이 운영하는 금융 교육 전문강사인증제를 통과한 인물들로, 학교에서 은행연합회나 예금보험공사 등 기관에 강연을 요청하면 기관이 강사를 섭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 교수는 강연의 ‘교육적 효과’에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매년 전국에서 수만명의 학생들이 이 강연을 듣지만, 한 자리에 모여 한 시간 남짓 앉아있다가 끝나는 경우가 태반이다. 외부 강사가 일회성으로 진행하는 수업인 만큼, 학생의 이해도를 점검해 가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기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강사도 어쩔 수 없이 경제 이론 전달식 강연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외부 강연을 진행하는 학교가 대도시 지역 등에 편중돼 많은 학생이 금융 교육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그는 근원적으로 정규 교육에서 충분한 금융 교육 시간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고등학교의 선택 과목으로 ‘경제’가 있고,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2025년부터 ‘금융과 경제생활’이라는 선택 과목이 추가된다. 중학교에서도 ‘사회’ 과목의 중단원으로 경제를 가르치지만 초등학교는 사실상 금융 교육이 전무한 상황이다.
한 교수는 “학계에서는 6살 정도만 돼도 금융 교육이 가능한 나이대라고 본다”면서 “모든 교육의 중심은 학교 교육이어야 하고, 그 교육에 대한 수년, 수십 년의 경험이 있는 것은 교사”라고 했다. 이어 “모든 아이가 공평하게 양질의 금융 교육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정규 교육과정에 금융 교육 시간을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규 교육과정에 금융 교육 과정을 새로 만들어 넣기는 매우 어렵다.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교과과정과 수업 시수를 축소하는 추세기 때문이다. 새로운 과목을 끼워넣기 위해선 교과 간 협의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한 교수의 진단이다.
이에 한 교수는 한 가지 묘수를 내놨다. 그는 “국어와 수학 등 다른 과목에 금융 교육을 융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국어의 비문학에 금융 관련 지문을 추가하고, 수학에서 비율을 가르칠 때 이자율 계산법도 함께 알려주는 식이다. 그는 “영국은 이를 법제화해 타 과목에서 교과서를 집필할 때 금융 교육 융합 내용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고 했다.
수준 높은 금융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사들의 역량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한 교수는 “2025년부터 고교 과정에 신설되는 ‘경제와 금융생활’은 좀 더 실생활에 가까운 금융 지식을 담아, 학생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면서도 “하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은 절반도 안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간 ‘경제’ 과목이 비인기 과목이었던 탓에, 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학교에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교육부가 금융 교육 관련 교사 연수를 늘려 더 많은 교사의 금융 교육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 “연금·보험 질문하는 아이들… 수업은 3년간 4시간에 그쳐”
한 교수의 진단처럼 교사가 정규 교육을 통해 실생활 금융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에 ‘동아리’라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학교를 서울 양천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김나영 양정중학교 교사는 2009년부터 교내 경제공부동아리 ‘실험 경제반’을 운영 중이다. 실험 경제반 학생들은 1년 동안 역할극, 창업 체험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경제 이론뿐 아니라 실생활에 밀접한 금융 지식을 배운다. 현재 이 동아리 회원 수는 25명이다.
김 교사는 학생들이 경제와 금융 전반에 걸친 관심사가 다양해 매년 놀란다고 했다. 그는 “주식 투자뿐 아니라 납세, 보험, 연금, 창업, 자원 분배의 공정성 같은 정치철학적 내용까지 궁금해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실험 경제반 지원자도 많아지는 추세다. 김 교사는 “학생들의 경제·금융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 것을 매년 체감한다”고 말했다.
올해 금리 인상이 사회적으로 자주 언급되면서 실험 경제반 학생들은 금리와 거시 경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학생들은 금리 인상·인하가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궁금해했고, 이에 실험 경제반은 한국은행, 기업, 은행, 시민 등 역할을 나눠 연극을 하며 시장을 공부했다.
한창 ‘롤드컵’으로 e스포츠가 화제가 됐던 때에는 게임 아이템 거래를 주제로 상품의 가격이 결정되는 요인, 자산의 희소성 등에 대한 토론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빚투(빚내서 투자)’가 사회적 문제가 됐을 때 김 교사는 학생들로부터 부채와 신용 등급에 대한 질문도 받았다.
동아리 활동으로 학생들의 금융 공부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지만, 본질적인 목마름을 잠재우기엔 부족하다. 동아리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학생들의 흥미를 지속해서 북돋아 줄 수 없다. 김 교사는 “중학교는 3년간 경제 수업은 4시간뿐”이라며 “이 안에 화폐, 교환, 소비 생활, 생애주기별 재무 설계 등이 모두 포함됐다”고 했다. 학생들의 관심도에 비해 경제를 배울 기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는 현재 교육과정에서 금융 수업 내용이 너무 단순화돼 있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중학교 사회 시간의 금융 차시에서 투자를 배울 때, 학생들은 투자의 성격(수익성·안정성·유동성)만을 배운다. 또 교과서는 주식은 위험자산, 채권은 안전자산으로 분류하는 데만 그친다.
김 교사는 “투자를 궁금해하는 학생들은 보드게임으로 투자를 배우게 되는데, ‘주사위 던지기’ 등 운이 개입되는 경향이 큰 게임들”이라면서 “이는 투자가 아닌 투기를 먼저 배우게 되는 셈이라 걱정이 많다”고 했다. 이어 “학교에서 제대로 된 금융 관련 개념과 이론, 경제 흐름을 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필수적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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