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섬의 '100년 등대' 지키며 새해에도 쉼 없이 바닷길 밝혀주는 그들
목포서 배로 2시간 30분, 또 산과 바다 건너 1시간
93년간 안 꺼진 등불, 바다 안전 위해 365일 지켜
번쩍.
2023년 12월 27일 오후 6시 30분쯤 전남 신안 홍도. 붉은 해가 서해 바다에 모습을 감추고 땅거미가 내려앉자,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순백의 등대에서 20초에 3번씩 불빛이 번뜩였다. 대한민국의 영해기점, 최서단에 위치한 홍도 등대다. 이곳에선 3명의 항로표지관리원(등대지기)이 머물며 1년 365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다를 살핀다. 2023년 계묘년의 마지막 해가 떨어지는 곳, 홍도 등대에서 항로표지관리원들과 1박 2일을 함께 보냈다.
산 넘고 물 건너 영해 파수꾼
홍도(紅島)란 이름은 석양 노을에 붉어진 바닷빛이 반사돼 섬 전체가 붉게 물든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홍도로 가는 바닷길은 녹록지 않다. 전남 목포에서 쾌속 여객선을 타고 흑산도를 거쳐 서쪽으로 115km, 2시간 30분을 달리면 홍도 1구 마을이 나온다. 등대까지 가려면 섬의 반대편으로 또 이동해야 한다. 깜깜한 밤 배가 항로를 잃지 않도록 존재하는 등대는 바다에 빛을 잘 뿌릴 수 있는 위치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홍도 1구 마을에서 3시간쯤 걸어서 산을 넘거나, 배를 빌려 1시간쯤 물을 건너면 인구 20여 명 남짓한 홍도 2구 마을이 나온다. 다시 20여 분쯤 언덕을 오르면 마침내 등대에 닿는다. 오전 6시에 목포를 출발했는데 등대 앞에 서니 오후 1시였다.
93년 동안 밝힌 서해의 등불
김영선(47) 홍도 항로표지관리소장과 조경현(43) 주무관이 "용케 찾아왔다"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항로표지관리원은 해양수산부 전문직 공무원이다. 육지에선 신호등과 교통경찰이 도로 안전을 책임지듯 항로표지관리원은 바다에서 선박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등대 불을 밝히고, 안개나 폭풍 등 기상 이변이 발생할 때 조명·음향장치 등을 가동한다. 등대만 관리하는 게 아니라 바다에 떠 있는 부표나, 암초 위에 설치된 등표시설도 점검한다.
홍도 등대는 우리나라에 있는 33곳(2021년 기준)의 유인등대 중 하나다. 원통형이 아닌 사각형의 각진 기둥이 인상적이었다. 100여 년 전 세워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홍도 등대는 1931년부터 2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이 꺼진 적이 없다. 등대 옆 잘 갖춰진 소나무 정원도 눈에 띄었다. 따로 관광용으로 조성한 게 아니라 항로표지관리원들이 등대에 들어올 때마다 각자 심은 소나무들이다. 김 소장은 "수십 년 매일 가꾸다 보니 자연스레 정원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홍도 등대의 빛은 약 40㎞ 떨어진 곳에서부터 감지할 수 있다. 해양영토 기점에 위치해 있어 중국 어선들도 이 불빛에 의지한다. 등대는 빛만 뿜어내지 않는다. 소리, 전파도 퍼져 나간다. 날씨가 안 좋거나 안개가 자욱해 등대 빛을 인지하기 어려울 땐 '전기 혼(horn)'을 사용한다. 김 소장은 "홍도 등대는 영해를 지키는 붙박이 보초병인 셈"이라고 했다.
홍도 등대는 전국의 유인등대 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다. 기상이 악화되면 배가 끊겨 고립되기 일쑤다. 섬에서 2구 마을로 가는 길은 더 험하다. 파도가 높아 배가 안 뜨면 20여 일간 생활할 물품을 지게에 이고 산을 타야 한다. 김 소장은 "처음 등대에 올 때 주민들 도움을 받아 냉장고를 들고 산을 넘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마을에서 등대까지 화물을 옮길 수 있는 설비가 있으면 좋지만 홍도섬 전체가 천연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외로움은 숙명, 새해 첫날도 등대 지킨다
홍도 등대에선 3명의 항로표지관리원들이 교대 근무를 한다. 2명이 주야를 번갈아 한 달에 21일 일하고, 나머지 1명은 9일간 쉰다. 운이 좋아 쉬는 날과 새해나 연휴가 겹치면 가족들과 명절을 보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꼼짝없이 등대와 함께해야 한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외로움은 이들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다. 김 소장은 "10월에 초등학교 1학년 아들 팔이 부러졌다는 소식을 여기서 듣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털어놨다. 조경현 주무관 역시 "첫째 딸이 다섯 살인데 휴가가 끝나면 '아빠 또 집에 놀러와'라고 인사할 때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항로표지관리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김 소장은 "첫 발령을 받은 날 배에서 내리다 겨울바다에 빠졌는데 밤하늘을 보며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고 떠올렸다. 올해로 8년 차인 조 주무관도 "입사 후 3개월째 되던 1월 2일 새해 첫 근무를 서다 하늘을 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고 회고했다.
장비 점검부터 구급 구조까지 만능인
김 소장은 올해로 23년 차 베테랑이다. 항로표지관리원들은 2년씩 유인등대를 돌아가며 순환 근무를 하는데 18년 전엔 홍도 등대에서 일했고, 가거도, 당사도, 하조도 등 여러 유인등대를 거쳐 2022년 다시 홍도 등대 소장으로 돌아왔다. 외따로 떨어진 등대에서 근무하는 항로표지관리원들은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만능인이 돼야 한다. 등대 불빛을 밝히는 등명기부터 무선신호 발신기, 정전에 대비한 비상 발전기, DGPS(위상항법보조시스템) 감시 장치, 항로표지식별장치를 모두 점검하고 이상이 발생하면 직접 수리까지 한다. 병원도 파출소도 없는 인근 마을을 위해 경찰, 소방관, 구급 구조대, 전기 기술자 등 '일인다역'을 소화한다. 작년 10월엔 80대 마을 노인이 쓰러져 이들이 직접 큰 병원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2024년 안전한 한 해 되길 기원
오후가 되자 김 소장과 조 주무관은 등탑에 올라 창을 정성스럽게 닦고 등명기를 회전하는 설비 사이에 윤활유를 발랐다. 정전에 대비한 디젤 발전기와 안개에 대비한 공기 사이렌, 고장에 대비한 예비 등명기 등 각종 기계 설비도 꼼꼼히 점검했다. 등대의 불은 하룻밤이라도 꺼지면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겨선 안 된다. 인근 무인등대가 잘 작동하는지 살피는 것도 이들의 임무다. 해가 진 뒤 김 소장은 인근 지역을 순찰하고 돌아와 밤새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했다. 오전 6시가 되자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등명기 불빛이 자동으로 꺼졌다. 김 소장은 다시 등탑에 올라 재차 창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2024년 새해 첫날에도 어김없이 '100년 등대'에 불을 밝히고 있을 항로표지관리원들의 소망은 무엇일까. 김 소장은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우리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이 무사고로 안전하게 항해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신안= 김진영 기자 wlsdud451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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