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지역 문화예술의 자양분이 될 아카이브

이진규 기자 2024. 1. 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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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이 남긴 기록물, 창작 작품 버금가는 가치
지역 차원 수집·보존·활용, 2차 콘텐츠로 이어지길

유럽의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영국 런던은 여러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다. 찰스 디킨스나 존 키츠 같은 문인뿐만 아니라 요절한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존 레넌, 프레디 머큐리 같은 음악인 등 숱한 예술가가 머물렀다. 카를 마르크스 같은 사상가도 런던 생활기를 보냈다. 템스강 남쪽 램버스에는 한국인들도 사랑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코벤트가든의 미술상에서 일할 때 머물던 집이 있다. 이 집 앞에는 주민이 심은 해바라기가 방문객을 맞는다. 이처럼 주로 예술가를 위주로 기념할 만한 인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물에는 공통으로 ‘블루 플라크’라고 부르는 푸른 색의 명판이 붙어 있다. 푸른 명판 제도는 19세기 영국왕립예술협회가 시작해 운영 주체가 몇 차례 바뀐 뒤 1986년부터는 잉글리시 헤리티지라는 단체가 운영한다. 도시 전역의 900개를 넘는 푸른 명판은 예술가들이 런던을 얼마나 사랑했고, 또 런던은 이 예술가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예술가들이 머물다 간 공간은 그 지역의 문화적 자산으로 남으며 오래, 계속해서 활용된다.

특정한 공간이 여러 예술가의 활동 무대가 되는 것과 달리 한 예술가의 여정도 머물다 간 곳마다 문화 자산이 되는 흔적을 남긴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유독 역마살이 낀 것처럼 러시아는 물론 유럽 곳곳을 다녔다. 모스크바의 생가에서 출발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유형지인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친 뒤 런던 파리 제네바 피렌체 드레스덴 등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죄와 벌’ ‘악령’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러시아 안에만 여섯 군데의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가 생활을 위해, 작품을 위해 머물던 곳에는 ‘도스토옙스키가 ○○○○년에 이곳에 살면서 집필했다’와 같은 그를 기념하는 표식이 붙여졌다.

예술가들의 흔적을 보존하고 기념하는 일은 부산이라고 다를 바 없다. 부산 금정구 남산동에는 요산 김정한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다. 동구 범일동에는 한국전쟁 시기 이곳에서 가족과 한때를 보냈던 이중섭을 기억하는 이중섭거리와 전망대가 들어섰다. 한국전쟁 시기 숱한 예술가가 부산에서 교유하며 창작활동을 한 것을 비롯해 수많은 예술가가 부산에 그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판잣집에서 살았던 이중섭의 부산 생활이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처럼 급속도로 도시 개발이 이뤄진 부산에서는 불과 수십 년 전의 건물이라도 당시 특별한 가치를 지닌 곳이 아니었다면 대부분 사라졌다. 강서구 대저동에는 작곡가 금수현 생가터의 기록만 남아 있고 인근 낙동강 강둑에 그의 대표작 ‘그네’ 노래비가 그를 기억할 뿐이다.

부산의 지역적 특성에서 부산에서 태어나거나 거쳐 갔던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건물을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하기는 애초에 자원 자체가 부족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근래 지역 예술가들의 예술 작품은 물론 예술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일기 사진 편지와 같은 사적 기록물, 문헌자료, 예술가의 수집품과 같은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해 활용하는 예술인 아카이빙 작업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은 다행스럽다. 특히 부산문화재단이 시행하는 아카이빙 작업은 이미 10년을 넘어서며 지역 문화예술과 관련한 데이터베이스를 빠르게 확장한다. 2011년 무용을 시작으로 연극 음악 전통예술 미술 문학 등 예술 분야별로 자료를 수집했고, 지역 예술가를 기리는 기념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그 활동 과정에서 남긴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 예술 작품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다. 특히 이를 활용한 전시는 미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전시의 한 부분으로서 작가의 아카이브를 선보이는가 하면 아카이브 자체가 전시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경남도립미술관은 2023년 상반기 통영 출신 조각가 심문섭의 개인전 ‘심문섭:시간의 항해’를 열면서 1개 섹션을 작가 연보 자료 드로잉을 보여주는 아카이브 공간으로 꾸며 관람자가 작가의 작품 세계에 더욱 면밀하고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경남도립미술관은 하반기에는 ‘미술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를 전시의 형태로 보여주는 ‘아카이브 리듬’ 기획전을 열기도 했다.


이처럼 예술가들이 생활한 ‘공간’뿐만 아니라 작품 활동을 하며 ‘생산한’ 모든 것이 지역 문화자산이자 관광 자원이 될 수 있다. 이같은 문화자산을 체계적으로 수집 보존 활용하기 위해 부산 지역에서는 문화예술 기록원이나 기록관과 같은 공적 기관의 설립과 운영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단지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차원에서 아카이브의 수집과 보존은 지역의 문화적 토양을 비옥하게 가꾸는 일이다. 지역 문화예술의 아카이빙 작업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뤄져 2차 콘텐츠 생산의 풍성한 자양분이 되기를 바라본다. 그 결실은 시민이 맛보게 될 터이다.

이진규 편집국 부국장 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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