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이불을 깁다
꽝꽝 언 겨울뿐인 세상에 대해 상상해본다. 밖은 눈으로 덮여 있고, 호빵과 붕어빵은 철을 가리지 않는다. 가습기 마를 날 없는 실내를 나서자마자 사람들은 잰걸음을 놓겠지. 변하는 것이 어디 걸음뿐이랴.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세상의 온도에 맞춰 변할 것이다. 반대로 열대우림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겐 열대가 일러주는 방식이 있을 테다.
우리집 아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다. 엘사, 안나 자매의 성장담은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영원처럼 되풀이됐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이명이 되어 귓가를 떠나지 않았고, 길 가던 낯 모르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노래를 부를 것만 같았다. 그러던 아이는 어느 날, 왕국으로의 발길을 뚝 끊었다. 꽝꽝 언 겨울뿐인 세상에 대해 떠올리게 된 것이 그쯤이었다. 설거지를 하며 혼자 ‘렛잇고’를 흥얼거리던 그쯤.
계절 구분이 선명한 이 나라에서 나는 과연 사계절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을까? 시간강사로서의 난 학기와 방학을, 소설 쓰는 사람으로선 이야기가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라는 양단 간의 세계에 속했으면 속했지, 여름과 겨울 사이의 봄가을을 제대로 감각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초가을까지 입었던 옷을 박스에 넣고, 겨울 내 입을 옷을 옷장에 걸고, 홑이불 대신 두꺼운 솜이불을 꺼내는 일도 일 년에 두 번이었다. 바지런히 사계절을 살아내는 사람이라면 진작 알아챘을까. 이불이 많이 낡아있었다. 세상 어떤 마모도 과정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갑자기 이렇게 낡아질 수도 있나? 설마, 이불은 자신의 낡음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
이불깁기가 이뤄진 것은 족히 한 달은 더 흘려보낸 뒤였다. 티브이에서 우연히 누비이불 달인을 보았던 것이다. 애청까진 아니지만, 즐겨보는 해당 프로그램은 각 분야의 오랜 직업인을 찾아가 그만의 놀라운 기술을 소개하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그러곤 생활인으로서의 생에 성실한 결과라는 숭고함을 시청자들에게 일깨워주었는데, 경력 43년 달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누비무늬들은 나를 잡화점으로 내몰았다.
덧댈 천을 저렴하게 구한 것까진 좋았으나, 한 달 사이 천이 더 삭았는지 목 아래서 자주 접히는 부분이 찢어지고 말았다. 한 번 찢어진 이불 홑청은 절로 그 범위를 넓혀갔다. 심지어 바늘을 밀어 넣은 자리도 지지하지 못하고 찢어졌다. 그때 내 머릿속에선 수많은 달인들이 스쳐지나갔다. 그처럼 일반인이 주인공인 프로그램이 또 있다. 세상에 이리 신기한 일이 있다며 각종 재주와 사연을 풀어내는 그 프로그램이야말로 나의 애청 프로다. 범상치 않은 인생들이 펼쳐놓는 이야기는 케이블 채널의 재방송으로 볼 때 농도가 더 짙게 느껴진다. 수십 년 이어온 프로답게 본방송은 몇 해 전에 송출됐던 것인지 얼른 가늠하기도 어렵다. 제보자나 주인공의 화장법, 자막의 촌스러움 정도로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이격된 것인지 추정할 뿐. 마라톤에 대한 열정이 유난한 팔순 넘은 중노인의 사연을 보면서 여전하실까 생각해본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오 분만에 읽어내는 속독 신동은 지금쯤 문학청년이 되었을까….
왜 시간은 그때 그 자리에 머무르는 법 없이 흘러가 모든 것을 낡거나 평평하게 만들까. 깜짝 놀랄만한 사연의 주인공이 돌아가시면 세상은 어제보다 좀 더 차분해지는 걸까? 아닐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마모시키고 닳아지게 만들지만, 능력을 잃어버린 신동에게 신동이었던 기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노인의 마라톤 사랑은 시청자인 내 앙상한 다리를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다시 이불 이야기로 돌아가 저이의 마모를 조금이라도 일찍 알아차렸다면, 아니 알아차린 그때라도 깁기를 실행에 옮겼다면 덧댈 천은 그만큼 덜 들었을 테다. 수없이 되풀이해 보아도 늘 처음인 것처럼 엘사의 노랠 듣는 아이는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 아닐까. 아이는 시간 속에서 마모되지 않는다. 저항하지도 않으며, 다만 성장할 뿐.
지나간 계절에 애끓거나 오지 않은 시간이 두려워 지금을 살아내지 못하는 이여, 자기 안의 방치된 이불 끄집어내어 깁기를 시작하자. 이 누비질은 사랑한다는 말의 바늘과 미안했다는 말의 실만 있으면 누구든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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