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괜찮다, 우린
처음으로 안전속도 5030이 도입된 즈음을 돌이켜 보면, 시속 50㎞의 제한속도는 운전자 입장에서 매우 답답했습니다. 조금만 밟아도 금세 속도가 붙어, 과속 단속 카메라 앞에서는 전방을 주시하지 않고 계기판만 보게 됐죠. 순간, 단속 카메라가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게 되는데요. 물론 애초에 천천히 가겠노라고 마음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뒤차가 바짝 붙으며 만들어내는 검은 그림자를 애써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죠.
그런데 안전속도 5030 정책을 가장 먼저 시행한 곳이 부산이고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어느새 익숙해진 것인지, 시속 50㎞가 넘어가면 굳이 계기판을 보지 않더라도 과속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죠. 그러니까 시속 50㎞ 제한속도가 답답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요. 이제는 시속 50㎞가 충분하다고 체감 중입니다.(때때로 여전히 답답함을 느끼지만)
그러던 어느 날, 출장을 마치고 직접 운전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렸습니다. 새벽 시간이기도 했고 촉박한 탓에 휴게소 한 번 들르지 않고 부산까지 곧장 쏘았죠. 그렇게 4시간가량, 계기판의 속도는 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도착한 부산 도심에서 내비게이션은 계속해서 과속 단속 카메라 주의 안내음을 울렸습니다.
속도를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한 번 울리기 시작한 안내음은 어린아이의 생떼처럼 좀처럼 멈추지 않았죠. 결국 한껏 속도를 늦춰 시속 50㎞ 이하로 맞췄는데요. ‘이건 거의 걸어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참 웃기는 일이죠. 안전속도 5030으로, 일반도로에서 시속 50㎞가 충분하다고 평소에 느꼈는데요.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내려오니, 속 터지는 느린 속도라며 제한속도에 맞추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력에 대한 성장과 변화가 더디고 힘들 때, 그것은 느린 것이 아니라 내가 빠르게 달려왔음을 증명해 준 결과라고 말이죠.
우리가 해외여행 갈 때,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작은 집과 모세혈관 같은 도로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미니어처 같은 풍경은 창문 너머 천천히 지나가죠. 하지만 지상 속도로 보면 시속 900㎞ 남짓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정체된 듯한 풍경과 달리, 결코 느린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관찰의 시점이 달랐던 거죠.
그러니까, 때때로 우리의 시선은 자기 객관성을 망각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소중한 나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 더욱 매섭죠. 옆에 서 있으면 ‘휘리릭’하는 소리가 다른 이를 움찔하게 합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만 모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빨리 달렸기에, 지금 잠시 힘든 시기를 겪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SNS 속 사람들, 주변 지인, 얼굴도 모르는 엄마 친구 아들·딸과의 무한한 경쟁에 나를 밀어 넣고 있는 요즘입니다. 우스갯소리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평범함의 기준이 점점 더 상향화되고 있어, 이제는 평범한 삶 자체가 애초에 평범하지 않은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에 뒤질세라 무한동력을 꿈꾸며 열심히 쳇바퀴를 굴리고 있죠. 그것도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말입니다. 빠르게 앞질러나가지 못하더라도, 무리에서 뒤처지는 것에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니까요.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며, 가수 김장훈의 노래처럼 때로는 세상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노력한 것에 대해서도 배신당할 수 있죠. 그래서 힘껏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는 ‘평범함’에서 벗어났으며 느려터진 아류라고 스스로 평가절하할 수 있는 위기에 덮일 수 있죠. 그러나 사실, 그것은 ‘느린 것’이 아니라 ‘빨리 달려왔음’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도 있던 겁니다.
미국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는 아예 “느리게 가는 것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대신 “멈춰 서는 것만 아니면 된다”고 했죠. 그러니, 간혹 이라도 우리는 자신에게 ‘괜찮다’고 해줘야 합니다. 사회적 기준이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허덕이다 보면, 스스로의 중심을 잃어버리기 쉬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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