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신춘문예] 질주하는 세계, 그럼에도 지금 여기 ‘있는’ 몸
1. 몸의 행방
지면에 발을 딛는 동시에 힘껏 밀어내며 반대쪽 고관절과 무릎을 접어 올린다. 몸의 움직임을 머리로 인지하기도 전에 허공에 떠오른 발이 내려와 다시 지면을 딛고 밀어내길 반복한다. 코로 들이마신 공기가 기도를 통과해 폐에 가득 차고, 이내 뱉어낸다. 거친 숨에 어깨를 들썩이며 양팔을 앞뒤로 움직인다. 얼굴을 들어 바람을 맞고 시선은 정면을 바라본다. 시선의 양쪽 가장자리로 풍경이 조금씩 사라진다. 달리는 일은 지금 여기 존재하는 몸을 느끼는 방법이자, 세계와 몸을 맞대며 만나는 경험이다.
장소를 요가 매트 위로 바꾸어 본다. 한 자세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 요가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상상 이상으로 격렬한 운동이다. 근력을 이용해 하나의 동작 안에 머무는 것은 흔들리는 몸의 감각과 지속적으로 싸우는 일이다. 고요한 자세를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미세한, 그러나 격렬한 떨림이 보인다. 지면에 닿은 몸의 부분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힘은 어떤 경로를 통해 움직이는지, 흔들림과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내 몸을 어느 쪽으로 얼마나 움직일지 판단해야 하지만 긴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매 순간 지금의 싸움이다. 정신보다 몸이 앞서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지속하는 몸을 느낄 때, 우리는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감각을 오롯이 느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장소를 바꾸어 모니터 앞에 앉는다. 이미지와 이미지, 텍스트와 텍스트가 빠른 속도로 교환되고, 우리는 아주 먼 곳에 있는 타인을 볼 수도, 반대로 보여질 수도 있다. 여기 있지만 여기 없고, 여기 없지만 여기 있다. 또한 거기 있지만 거기 없고, 거기 없지만 거기 있다. 철학자 한병철(b.1959)은 오늘날 타자와 맺는 관계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가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해 타자와의 거리를 파괴하고 그를 가까이 끌어오려 할수록 타자성은 파괴된다고 했다. 이는 급기야 타자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서로의 존재를 굳건하게 확인하는 일은 다름의 발견이 있어야 하고, 다름에는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1)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맺는 관계도 같다. 매체의 발달로 인해 멀리 있는 것을 빠르게 눈앞으로 끌어올 수 있고, 동시에 수많은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시대다. 시각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정신은 쉽게 공간을 넘나든다. 그러나 산만하게 움직이는 눈동자와 손가락 외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몸 전체를 느끼는 일은 드물다. 거리를 늘였다 줄이며 넘나드는 사이에 우리의 몸은 조각나버렸고, 가장 가까운 내 몸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지금, 우리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2. 가속의 시대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b.1932)는 이러한 현대사회의 양상을 속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동수단의 속도가 빨라지고 통신의 발달로 전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면서, 삶의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동의 과정과 거리의 감각이 사라졌다. 공간과 관계 맺으며 천천히 이동하는 유목민이나 도보여행자가 아니라 기차나 자동차 안에 가만히 앉아서 차창 밖으로 빠르게 달아나는 세계를 바라보는 운전수의 시각적 환영이 우리를 지배한다. 비릴리오는 이를 ‘질주경(dromoscopie)’이라 불렀다.2) 이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으며,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또한 보여질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 해체되는 사이로 우리의 몸도 파편화된다. 어느 곳에도 중심이 없다.
이는 예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매체와 기술의 발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짚어내는 다른 매체 이론가와 달리 비릴리오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현대의 예술을 지배하는 미디어는 물리적 경험과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무너뜨렸다. TV와 유튜브에 등장하는 장면은 실제 사건을 재현한다기보다는 원격으로 현전시킨다. 먼 곳의 장면을 눈앞으로 실감 나게 끌어오지만 실제로 여기 존재하지 않으며, 빛이 꺼지는 순간 사라진다. 비릴리오는 이러한 ‘원격현전’을 그저 나타내어 보여주는 현시와 같다고 보았다.3) 미디어는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이를 통과하는 예술을 마치 순식간에 발현했다 사라지는 무용이나 퍼포먼스처럼 순간의 예술로 만든다. 그리하여 현대사회의 미술은 재현을 통해 지속적으로 머물 장소를 마련하지 못하고, 순간의 현시로 어떻게 스펙터클을 보여줄지 고민하게 되었다.
비릴리오가 말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가속화로 인해 신체가 파편화되며 예술은 장소를 잃는다. 그러나 이렇게 질주하는 세상 속에서 속도를 늦추며 신체를 중심으로 다시 끌어오려는 미술의 노력이 있다. 신체의 소외와 지각의 파편화를 재현으로서 보여주고, 세계와 몸을 맞댄 채 서로의 살을 만지며 여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또한 반복하는 신체의 수행성으로 부유하는 신체 이미지를 붙잡아 눈에 보이는 흔적을 남긴다. 이들이 어떻게 신체를 가운데로 잡아끌며 머물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가 살펴보는 일은, 질주하는 세계의 속도에 묻혀 소멸하고 망각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방향을 틀며 저항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2-1. 속도의 지각
세계는 이미 우리 몸의 속도를 벗어난 지 오래다. 물리적 속도는 물론 변화의 속도까지도 개인의 능력으로 따라잡기에 너무 멀리 가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 어떤 문제든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회 문제 속에서 어긋난 틈새를 빠르게 발견하고 작품으로 가시화한다.
여기 서로 다른 속도가 강하게 마찰하는 장소가 있다. 장서영(b.1983) 작가의 개인전 《SKID》다.4) 기다란 직사각형의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그린 드로잉 연작 <무제>(2022)가 줄지어 걸려 있다. 걸으면서 감상하면 연속된 시퀀스로 느껴지도록 자동차의 움직임을 프레임 단위로 나누어 표현했다. 반대편 벽을 바라보면 거치대에 수액팩이 걸려 있다. 팩과 연결된 호스가 바닥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고, 그 안에는 천천히 수액이 흐른다. 우리 몸 안에서 흐르는 체액 같기도, 이미 노화된 몸이 의지하는 인공의 장치같기도 하다.
오른쪽과 왼쪽에서 대조적인 속도의 흐름을 느끼며 전시장을 따라 걸으면, 기다란 전시장의 끝에서 빠르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단채널 영상 작품 <스키드>(2022)다. 작품의 제목인 ‘스키드(skid)’는, 고속으로 달리던 자동차가 급제동할 때 생기는 ‘스키드 마크’를 말한다. 타이어가 회전이 잠긴 채 미끄러지면 강한 마찰열로 인해. 타이어의 고무 성분이 순식간에 분해되어 도로의 표면에 묻어나는 것이다. 전시의 제목과 같은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주제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는 우리의 신체가 35세까지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효기간이 끝난 신체는 점점 기동성이 떨어지고 연산력이 저하된다. 그러나 점점 더 속도가 빨라지는 현대사회, 자연스런 노화와 상관없이 더 빠른 적응력과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환경 속에서 우리는 몸의 느린 속도를 더 크게 느낀다. 작가는 영상 속에서 내내 자동차의 빠른 움직임과 내부의 정적인 분위기를 교차시킨다. 우리는 점점 느려지는데, 자동차 밖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불안감을 조성하는 텍스트가 러닝타임 내내 영상을 관통하고, 관객은 불현듯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깨닫는다. 안팎의 속도가 점점 달라져 더이상 따라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차체가 미끄러지는 방향을 따라 짙은 스키드 마크가 남는다. 막다른 길 앞에서 살아남으려 저항한 흔적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자연스런 노화와 병으로 유효기간이 끝난 신체가 점점 빨라지는 현대 사회의 속도를 따라 갱신하는 것이 가능한지 묻는다. 뒤돌아 기다란 전시장을 빠져나온다. 양쪽에는 여전히 다른 속도가 흐른다. 자동차의 움직임이 나란히 연결된 드로잉 연작에서 마치 버퍼링 걸린 화면처럼 세로로 쪼개진 프레임이 눈에 띈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몸은 연속된 감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를 겨우 받아들인다. 감각이 쪼개지고 과정이 잊혀진다.
2-2. 피크노렙시의 풍경
비슷한 시기에 열린 김양우(b.1986) 작가의 개인전에서는 이러한 파편화의 과정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을 볼 수 있다. 전시 《통근 생활》5)은 도시에서 개인이 매일 겪는 통근의 경험, 정확히는 통근 거리와 시간을 가시화한다. 작가는 경기도와 서울 간 67.32km를 오가는 장거리 통근 경험을 시작으로, 중심을 향해 모여드는 통근자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주로 아시아 지역 통근자들의 사례를 수집했고, 이를 지도와 사진, 텍스트, 영상, 조형물 등으로 표현했다.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에서 싱가포르로 출근하는 로박림의 통근 거리는 44.6km, 군마와 도쿄 사이를 출퇴근하는 80대 임상학자 히노하라 요시카즈의 통근 거리는 88.2km다. 이들은 지하철과 버스, 기차를 갈아타고, 고속도로와 고층 건물 사이를 수없이 지난다. 교통망의 발달로 우리의 이동에는 자유가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 다녀야 하는 통근길은 자유라기보다는 벗어날 수 없는 사슬이나 무거운 피로에 가깝다.
그 사이에서 조각 <속도의 풍경>(2017-)은 이들이 경험하는 속도를 되새기도록 한다. 투명 아크릴 안에 도시 풍경을 담은 사진 이미지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온전한 모양이 아니라 칼로 얇게 저며낸 듯 쪼개지고, 양쪽에서 강하게 잡아당긴 듯 눌리고 뭉개져 있다. 이 해체된 이미지는 비릴리오가 말한 이미지의 파편화, ‘피크노렙시(picnolepsie)’ 현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정지해 있을 때는 멈춰 있는 이미지를 바라본다. 걷거나 뛸 때는 흐르는 이미지를 본다. 그런데 자동차나 고속열차 등 빠른 속도의 이동수단에 올라탄 경우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몇 곱절이나 빠르게 이미지가 흐른다. 우리의 몸은 흐르는 이미지를 모두 지각할 수 없고 일부 잔상만 인지하게 된다. 심지어 더 빠른 비행기를 탔을 때에는 이동하는 거리를 직접 보지 못하고 처음과 끝만 기억한다. 결국 우리는 보았지만 보지 못한 일종의 기억 상실 상태에 이른다. 이렇게 속도에 의해서 우리의 지각이 재편되고 파편화된 이미지를 인식하는 상태가 피크노렙시’다. 피크노렙시는 희랍어의 ‘picnos-(빈번한)’와 ‘lepsie(발작)’을 합성한 단어로 비릴리오의 이론에서 ‘빈번한 발작’, ‘의식의 중단’을 의미한다.
한 곳을 오래 바라보는 감각은 빠른 속도에 박탈당해버렸다. 우리는 과정이 없이 시작과 끝만 가진 서사, 생략된 잔상만을 가진다. 실제 감각의 과정을 잃고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내 몸을 잊는 것과 같기에, 빠른 속도 사이에서 이미지가 파편화되며 신체도 해체된다. 과정과 의미를 담지 못한 몸은 온전한 전체가 아니라 흩어진 조각이 된다.
전시장의 지하로 내려가면 어두운 곳에 설치된 영상이 보인다. 통근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와 사진, 텍스트, 조각을 지나 우리는 이제 실제로 통근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로박림의 44.6km, 히노하라 요시카즈의 88.2km, 그리고 김양우의 67.32km. 타인의 경험을 정보화하기를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 따라가 본다. 빠르게 스치며 쪼개지는 풍경이 아니라,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의 등과 부지런히 걷는 발에 시선을 둔다. 우리의 통근길과 다름없는 장면 속에서 그들 몸의 속도는 전혀 빠르지 않다.
2-3. 비어버린 중심
그런데, 서로의 감각을 드러내어 연결하며 너무 빠른 이동의 부작용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영상 작품은 또 다른 문제를 상기하도록 한다. 말레이시아와 일본에 있는 타인의 경험을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미디어라는 새로운 매체 때문이다. 미디어 또한 멀리 있는 것을 우리의 앞에 빠르게 끌어 당겨 오는 도구로서, 빠른 속도의 이동수단과 작동방식이 닮았다.
실제로 비릴리오는 피크노렙시의 원인이 광학기계라고 말한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미디어가 나타나면서 우리 삶의 방식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것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닿는 경험과 대면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잊게 되었다. 파편화된 이미지를 수집하는 사이에 과정과 의미를 망각하며 빈번한 의식의 부재를 겪는다. 대중의 의식은 점점 위험에 처하고 있다.6)
예술작품이 세계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시선이 더해지고 매체에 따른 외형의 변화가 일어난다. 때문에 우리는 작품을 볼 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고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예술작품의 이미지는 인터넷과 스크린을 통해 보여진다. 세계를 재현한다기보다는 현시하는 광학은 우리를 과도하게 사건 가까이로 끌어들인다. 실제 경험과 흡사한 고화질 영상 이미지를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제공하며 관객의 시각적 감각만을 극대화한 콘텐츠는, 오히려 비판적 태도와 객관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이는 관객을 사건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텔레비전과 유튜브가 대표적인 매체다.7)
또한, 무분별한 현시와 이미지의 재생산이 가속화되며 예술가와 작품 사이의 시공간, 작품과 관객 사이의 거리가 파괴된다. 인간이 빠른 속도 속에서 기억의 상실을 경험하듯이, 예술작품 또한 어떤 기억도 규칙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 예술작품이 가지던 고유성과 지속의 개념이 파괴되는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예술적 재현은 원격현전, 즉 현시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8) 앞서 언급한 한병철의 주장처럼, 타자를 빠르게 눈앞으로 끌어오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하여 거리를 파괴했다. 그러나 멂을 지운다고 가까움이 형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의 부재로 인해 가까움이 삭제되고 만다.
이것은 예술작품뿐 아니라 현시대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빠르게 달려 거리를 좁힐수록 진짜 욕망하던 것들이 멀어진다. 이러한 오작동은 결국 모두가 중심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비릴리오가 말한 ‘전원 퇴장(Extra Omnes)’이다.9)
3. 몸이 ‘있다’는 확인
디지털 미디어로 인해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고 빠른 속도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된 상황에 대하여 많은 매체 철학자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속도와 편리, 복제와 재생산으로 인한 대중성,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 등 장점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빠르게 도착하는 결과만 중시되고 과정이 사라진 사회는 장점만 가지기 어렵다. 머무름과 기다림이 없는 이곳에서는 모두가 속도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이를 장악하는 자가 권력을 가진다. 비릴리오가 광학기계의 발달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다. 산업혁명과 증기기관의 발달이 삶을 편리하게 만든 기적처럼 여겨졌지만 동시에 인간 소외와 노동 착취, 빈부격차와 같은 부작용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속도의 변화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없음의 감각이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의 몸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속도를 늦추거나 과정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지각하는 신체를 기억해야 한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b.1908)는 『지각의 현상학』(1945)을 통해 우리 존재의 주체는 정신이 아니라 몸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지각하는 것은 관념의 학습이 아니라 ‘몸-주체(body-subject)’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문에 살갗을 부대끼며 만지는 감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 빛이 꺼지면 바로 사라지는 광학기계의 현시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의 살을 만지며 잃어버린 기억과 현존의 감각을 재현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3-1. 살갗을 부대끼며
정희우(b.1973) 작가는 일종의 기록하는 방식으로 풍경을 남긴다. 거리를 직접 걷고 관찰하고 사진을 찍은 뒤 이를 한지에 채색하는 동양화 기법으로 풍경화를 그리는데, 전체 풍경을 빠짐없이 남긴다는 점에서 진경산수화의 태도를 계승하는 듯 보인다. 어떤 측량 도구도 없지만 자신의 보폭과 몸의 길이 등을 기준으로 거리를 가늠하면서 강남대로를 20미터 연작10)으로 그려내고, 서울역을 바라보는 빌딩 위에 수차례 올라서서 복잡한 교차로의 풍경을 옮겨낸다.11) 느린 속도로 작가의 몸을 통과한 풍경이다.
작가가 세계와 직접 몸을 부대끼며 남기는 흔적은 간판 시리즈에서 또렷이 보인다. 정희우 작가는 종로와 성수의 골목에서 오래된 간판들을 찾아냈다. 낡은 간판에 쌓인 먼지를 직접 손으로 털어내고, 종이를 대고 문질러 탁본을 떠냈다. 또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 새겨진 화살표 등 지시 기호를 그대로 떠내기도 한다. 수 미터에 이르는 종이 위에 도로와 작가의 몸이 마찰한 순간이 그대로 담겨 있다. 마치 건물이나 사물의 피부를 벗겨내는 하이디 부허의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직접 걷고 만지며 그려내고, 문질러서 도시의 피부를 벗겨내며 세계의 살을 만진 순간이다. 그 장소와 작가의 몸이 동시에 존재했던 시간이 종이 위에서 느리게 흐른다.
한편 조희수(b.1998) 작가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작품 <더 다이버스>(2021)는 조금 더 빠른 속도와 적극적인 태도로 세계와 살을 맞댄다. 정희우 작가가 걸었던 강남대로를 이 젊은 작가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흰 선으로 육상 트랙을 그리고 자동차와 건물과 사람들 사이를 전력 질주하는 행위를 작가는 ‘다이빙’이라고 칭했다. 다이버가 뛰어내리며 수면 위에 균열을 일으키듯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지역인 강남역 한복판에 난입하여 ‘사회적 수압’을 뚫어내는 것이다.
작품 제작이 이뤄진 2021년은 팬데믹으로 이동은 물론 숨쉬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시기였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로 모두가 부유하고 있었다. 작가는 사회적 막을 뚫고 온몸으로 세계와 부대끼며 질주한다. 내딛는 두 발, 앞으로 나아가는 몸, 거친 숨소리는 거기 ‘있다’는 확인과 다름 아니었다.12)
장-뤽 낭시(Jean-Luc Nancy, b.1940)는 몸이 그 자체로 발화하는 존재라고 했다.13) 낭시는 책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에서 메를로-퐁티 현상학의 살 개념과 달리 ‘살갗’을 말하는데, 몸 자체가 하나의 사유이며 그것을 끝까지 몰아붙인 것이 ‘살갗’ 즉, 표면이라는 것이다. 살갗이 서로 접촉하면서 사유와 사유가 연결된다.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살갗으로, 그러니까 몸의 표면으로 세상을 만지는 행위는 지금 여기를 확실하게 느끼며 서로 연결됨으로써 존재의 불안을 제거하는 일이다.
예술가들이 재현한 신체의 감각을 따라 눈으로 세계를 만진다. 이러한 예술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몸을 지각하며 새로운 사유를 생성한다. 발화하는 존재로서, 하나의 몸이 여기, 있다.
3-2. 수행하는 몸
몸으로 현재를 감각해야만 눈앞의 세상을 제대로 지각하고 존재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 타인을 비롯한 외부세계와의 연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이미지와 감각, 정보 사이에서 현재를 감각하는 방법을 잊고 말았다.
퍼포먼스의 대가인 유고슬라비아 출신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b.1946)는 몸을 매체로 사용하기 위해 비우는 방법을 연구했다. 세계 각지의 명상과 마음챙김 방법을 직접 경험하고 퍼포먼스 작업을 지속하면서 그가 깨달은 답은 ‘느려지기’였다. 지금 여기 있는 몸을 인지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감각을 먼저 되찾아야 하는데, 이에 아브라모비치는 일부러 느려지는 행위를 제안한다.
그가 진행하는 워크샵의 이름은 <집 청소(House Cleaning)>다. 우리의 몸을 ‘집’으로 상정하고 이를 깨끗하게 비워내는 과정을 청소에 비유한 것이다. 관객들은 스마트폰을 반납한 채 천천히 걷고, 소리를 듣는다. 한 시간 동안 단 한 번만 아주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적거나, 쌀알을 세기도 한다. 신체의 미세한 감각을 빠짐없이 느끼며 느린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주 작은 자극이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을 가지게 된다.
긴 시간 동안 진행되는 아브라모비치의 워크샵이 특별해 보이지만, 사실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행위들이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원데이 클래스, 요리를 하고 음악을 듣는 시간, 달리거나 산에 오르는 행위 등 신체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는 동안 우리는 잃어버린 몸을 되찾는다. 아날로그를 찾는 문화 현상 또한 현대인들이 신체의 감각을 그리워한 결과일 테다. 미디어의 빠른 현전이나 기계의 운동 대신 신체의 느린 행위에 집중한 예술작품들도 이러한 사회의 흐름과 떼 놓을 수 없다. 특히나 신체를 이용해 지난한 수행을 반복하고 그 흔적을 남기는 작품들은, 눈으로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신체의 감각을 일깨운다.
지근욱(b.1985) 작가는 직접 제작한 곡자를 이용해 색연필로 선을 긋는다. 유려한 곡선이 쌓이며 캔버스 위에 매끄러운 환영이 드러난다.14) 물리학에서 말하는 입자의 운동과 우주의 파동을 눈에 드러나게 표현한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작가가 아날로그적으로 노동한 흔적이기도 하다. 바닥에 캔버스 천을 펼치고 단순한 재료인 색연필을 지긋이 눌러 선을 긋는다. 반대편 손으로 곡자를 옮기고 다시 선을 긋기를 반복한다. 작가의 어깨와 팔이 움직이며 선이 쌓이고 화면이 팽창한다. 멀리서 보면 말끔해 보이는 선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작가가 일부러 털어내지 않고 남겨둔 색연필 부스러기들이 보인다. 색연필과 캔버스 천이라는 재료들이 마찰한 흔적이자, 작가의 몸이 선 위에 실은 무게의 증거다.
한편 종이 위에 글자를 쓰고 지우기까지 반복하는 안다혜(b.1992) 작가의 작업은 더욱 수행적이다. 2022년의 전시 《혼자 지운 서사》15)에서 작가는 오랜 시간 수집하고 분석해온 가족 내의 언어를 자신의 내부에서 지워내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발화하지 않았는데도 가족 구성원인 자신을 규정하고 얽매는 언어였다. 가족으로부터 발화된 가시 같은 말을 나무에 못을 박거나 천에 자수를 놓는 등 되새기는 방식으로 전작을 꾸렸던 작가는 이제 이 말들을 모아 다시 쓰기 시작했다.
6개월간 약 1만 4천 여자를 종이 위에 연필로 새겼고, 다음 3개월 동안은 이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거나 연필로 까맣게 칠해서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제거했다. 자기 몸에 새겨진 언어를 몸으로 뱉어내고, 다시 몸으로 지워냈다. 몸 안에 새겨진 기억을 지워내기 위한 반복적인 수행의 움직임이다. 약 9개월에 이르는 긴 작업기간 동안 기다란 롤 종이 위에 쓰고 지운 언어들은 전시장에 작품으로 남았다. 지워지고 덮였지만 종이 위에는 여전히 글자가 새겨졌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종이와 연필로 만든 아날로그적인 이미지 너머에서 사람이 움직인 흔적이 보인다.
기다란 롤 종이가 장막처럼 늘어져 전시 공간을 둘로 분할한다. 흰 종이 위로 작가가 지워낸 언어의 이미지가 흐르고, 관객은 손으로 종이 장막을 헤치고 다음 공간으로 넘어간다. 그곳에는 까맣게 지워낸 언어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이어지며 만든 동그란 모양의 <자리>(2022)가 있다. 마치 탑돌이를 하며 무언가를 바라듯 동그라미의 둘레를 따라 걷는다. 지워내고 덮어내며 반복했던 작가의 수행을 떠올리며 몸을 움직이는 사이, 관객도 여기 ‘있다’의 감각을 느낀다.
지근욱 작가와 안다혜 작가의 작품처럼 몸이 움직인 과정의 흔적이 작품 속에 남아 있을 때 관객은 작품 너머 타인을 상상한다. 작가의 몸은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았지만 그럼에도 몸은 사라지지 않았다. 관객의 몸이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을 통과하며 작가의 사유에 닿는다. 이미지 사이에서 살갗과 살갗을 맞대며 우리는 서로 연결된다.
3-3. 몸을 포개며 연결되는 우리
질주하는 세계에서 소외되는 몸을 다시금 불러오는 일은 아날로그 매체만 가능한 일일까? 여기 마지막으로 가상현실(VR)이라는 첨단 광학 매체로 이미지를 만드는 작품이 있다. 가상현실이라는 매체는 비릴리오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광학기계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극단적일지 모른다. 눈앞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펼쳐 놓았다가 기기를 벗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가상현실이야말로 우리의 신체를 빠르게 소외시키는 망각의 매체다.
권하윤(b.1981) 작가는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타인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하고자 한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1999)에서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경험이다. 이를 통해서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다양할 수 있으며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고 관객에게 말한다. 그는 최근 가상현실이라는 질주의 매체를 이용해 오히려 아날로그적 감각을 되살리는 시도를 하고 있다.
2021년에 공개된 가상현실 작품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 번째 시도>(2021)16)는 작가가 기존에 발표했던 작품들처럼 기기를 착용한 채 참여하는 가상현실 작품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장치가 더 있었다. 관람자를 따라 움직이는 퍼포머였다. 관객은 가상현실 속에서 각자 걷고 움직이며 다양한 동작을 하는데, 이때 훈련된 퍼포머가 관객 곁에 1대1로 따라 붙으며 그의 동작을 본따서 움직인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하나의 대구를 이루며 시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그 자체로 하나의 퍼포먼스가 된다. 가상현실은 기기를 착용한 관객과 이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 섞일 수 없는 벽이 생기게 마련인데, 작품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퍼포머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안과 밖의 세계가 섞이는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매체의 벽을 넘어 우리의 몸이 섞인다.
권하윤 작가의 최근작 <잊어버린 전쟁>(2023)17) 또한 가상현실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관객의 몸과 기억을 일깨우고 속도를 늦추려고 시도한다. 작품의 서사는 6·25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으나 잊혀지고 만 지평리 전투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전략적 요지였던 지평리를 중공군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싸웠던 이들은 미군과 프랑스군 그리고 프랑스군에 편입된 소수의 한국군이었다. 이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생존한 참전용사들의 구술기록과 프랑스 등 각지에 남겨진 자료를 탐구하던 작가는 또다른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건은 하나지만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개이며, 바라본 방향에 따라 다른 진실이 존재한다.
작가는 가상현실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외신 기자와 한국군, 프랑스군, 심지어 중공군까지 여러 입장에서 바라본 사건을 관객이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끈다. 기기를 착용하고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제각각 다른 행위 중인 인물들이 보인다. 그중 한 인물의 몸과 같은 위치에 내 몸을 위치시킨 뒤,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갠다. 가상현실 내에서 사용 가능한 핸드 트래킹(Hand Tracking)18) 기술이다. 손의 움직임을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장면이 바뀌고 그가 바라본 진실을 마주한다.
관객은 인물마다 다른 시선을 차례로 경험하면서 사건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작품의 상영이 끝나고 기기를 벗으면 공연이나 퍼포먼스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빛과 이미지가 사라진 뒤에도 기억을 가진 몸이 여기에 있다. 타인의 속도에 나의 속도를 맞추어 보며 서로의 경험을 상상하고, 하나의 사건을 여러 방향으로 살피며 느리게 경험한 몸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질주하는 세계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4. 속도 조절의 가능성
이렇게 우리는 여전히 살갗을 부대끼며 몸으로 발화하고 또 사유한다. 물론 지금도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하는 세계에서 이미지와 몸은 파편이 되어 흩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가냘프지만 온전한 서로의 존재를 더듬어 확인한다. 낭시의 책 제목처럼, 몸은 여기 있지만 한편으로 아주 멀리서부터 온다. 멀리 있는 그것을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창조하고 저항하는 힘이 필요하다. 동시대의 예술가들은 속도의 차이를 가시화하고, 살갗을 부대끼며 세계를 만지고, 몸을 움직인 흔적을 남긴다. ‘있다’의 감각을 재현하며 신체를 현전시키려는 노력이자, 빠른 속도를 거스르며 저항하는 태도다.
우리는 변화하고 생성하는 흐름 속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미지를 통과하고, 그 중 지각된 것을 ‘기억’한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b.1859)은 현재를 지각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건져 올린 이미지들을 ‘이미지-기억’이라고 불렀다. 예술가들은 동시대를 지각하고 이미지를 건져 올리며 자신이 경험한 시대를 작품이라는 형식으로 물질화시킨다.
베르그송은 관념을 표현하여 교훈을 전하던 과거의 회화와 달리,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관객과 공감하는 자연주의 회화를 더 높이 평가했는데, 아주 작은 풍경일지라도 그런 기록들이 모여 서로의 사유를 연결하고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몸을 통과한 이미지를 펼치는 작은 시도는, 개인의 기억을 발화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안에 공동의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이미지-기억’이 촘촘하게 모였을 때, 우리는 속도의 권력에 지배당하지 않고 아래에서부터의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
두 발을 땅 위에 단단히 딛는다. 실제로 달리며 땅을 딛고 밀어내는 발바닥, 흙의 냄새와 공기의 습도를 느끼는 호흡기, 과정을 모두 바라본 눈동자가 여기 ‘있다’. 기차에 올라타 잔상을 부여잡은 채 의식을 잃어버린 텅 빈 신체가 아니라, 진짜 기억을 가진 우리의 몸이다. 세계와 부딪히며 감각하는 몸이 천천히 쌓아낸 것들이 예술과 삶을 지속한다. 비릴리오는 질주하는 세계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우리의 몸이 여기 있는 한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예술을 통해 되찾을 수 있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야기19)를 되새긴다. 우리에게는 아직 사라지지 않는 이미지, 여전히 감각하는 몸, 지속함으로써 저항하는 예술이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에 희망과 가능성이 남아 있다.
1)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5, pp.42-43
2)폴 비릴리오,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열화당, 2008, p.27
3)배영달, 『속도의 예술 초미학』, 앨피, 2019, pp.53-54
4)장서영 개인전 《SKID》, 2022.4.16-6.12, 신도문화공간 (서울 성동구)
5)김양우 개인전 《통근 생활》, 2022.6.17-7.17, 합정지구 (서울 마포구)
6)배영달, 『속도의 예술 초미학』, 앨피, 2019, pp.53-54
7)같은 책, pp.53-54
8)같은 책, pp.56-57
9)폴 비릴리오,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열화당, 2008, p.103
10)정희우, <시간을 담은 지도>(2008-2011)
11)정희우 개인전 《길 위에서》, 2020.11.11-11.30, 서울일삼 (서울 용산구)
12)조희수 개인전 《The Divers》, 2021.3.31-4.3, 청년예술청SAPY (서울 서대문구)
13)장-뤽 낭시,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문학과지성사, 2012, pp.111-113
14)지근욱 개인전 《하드보일드 브리즈》, 2023.8.9-9.13, 학고재갤러리 (서울 종로구)
15)안다혜 개인전 《혼자 지운 서사》, 2022.10.04-10.16, 공간일리 (서울 종로구)
16)《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21: 멀티버스》 - 권하윤,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 번째 시도>, 2021.2.12-3.28,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Seoul 프로젝트 갤러리 (서울 종로구)
17)ACC 상호작용예술 연구개발 쇼케이스 《기억하기/감각하기 – 경험의 공동체》, 2023.10.26-11.19,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라남도 광주)
18)사용자의 손동작을 인식하여 컴퓨터를 작동하는 기술이다. 권하윤 작가의 해당 작품에서는 관객이 VR헤드셋을 착용한 뒤 가상공간 안에서 만나는 인물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동작을 따라 하면, 이 동작이 인식되면서 장면과 사운드가 전환된다.
19)마르셀 프루스트는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베르그송의 ‘이미지-기억’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했다고 한다. 주인공은 예술(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며 미래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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