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으로 새해를 보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원근법의 핵심은 일정한 시점이다. 플랑드르 지역 화가 코르넬리스 더발리외르(Cornelis de Baellieur·1607∼1671)의 갤러리 풍경화나 에마뉘엘 더비터(Emanuel de Witte·1617∼1692)의 실내 풍경화 앞에 서보라. 그 앞에 서면 누구나 화가가 인도하는 일정한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처럼 새해 결심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한 해를 바라보는 일관된 시선이다. 시점이 분산되어 있으면 자칫 생활이 무질서해질 수 있다. 한 해를 요령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인생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일정한 시선이 필요하다.
일정한 시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그 전과는 달리 보인다. 마치 레고 블록처럼 사물들은 체계적으로 배치된다. 더발리외르의 그림 속에서 각진 액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비터의 그림 속에서 기하학적 패턴이 방바닥을 채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그림에서 거울, 창문, 침대 등 사각의 프레임들이 가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원근법 시스템 속의 레고 블록들로서, 풍경의 체계화에 기여한다. 원근법으로 한 해를 전망해 볼 때, 1월부터 펼쳐질 열두 달의 시간 역시 자기 인생의 레고 블록들이다.
원근법의 시공간은 관객을 결국 소실점으로 인도한다. 원근법의 관람 포인트는 소실점에 무엇을 배치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1년간의 여정을 12월에 결산하듯이, 원근법은 자신의 여정을 소실점에서 결산한다. 소실점에서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원근법의 목표가 아닐까. 마치 우리의 목표는 속죄와 구원이라는 듯, 더발리외르 그림의 소실점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 있다. 진정한 성스러움이란 청소 같은 일상에 있다는 듯, 더비터 그림의 소실점 부근에는 청소하는 사람이 배치되어 있다.
무엇이 인생의 소실점에 있느냐 못지않게 의미심장한 것이 소실점의 존재 자체이다.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원근법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지리멸렬함을 극복할 수 있다. 소실점이 없었다면 분열되었을 세계가 이제 통일된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원근법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원근법을 구사할 줄 안다는 것은, 분열에서 통일을,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특정 관점에서 인생과 세계를 재창조해내는 창작자가 느끼는 쾌감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만들어 낸 창조주가 느꼈을 희열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였을까. 르네상스 시기 화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는 원근법대로 선을 그어대는 데 매료된 나머지 밤이 깊어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내가 우첼로에게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라고 재촉하자, 우첼로는 이렇게 대꾸했다. “원근법이야말로 진정 감미로운 것이다!”
소설이 곧 현실이 아니듯이, 원근법대로 그린 그림이 곧 현실은 아니다.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말했듯이, 원근법의 핵심은 왜곡에 있다. 그것은 휘어져 보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다가 엄정한 수학적 질서를 부여한 결과다. 원근법은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되, 그렇게 축조된 질서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인 것이다.
그러니 원근법으로 현실을 재단한다는 것은 너무 숨 막히지 않겠냐고? 수학적 질서가 우리의 현실을 억죄지 않겠느냐고? 새해 결심이 일 년 내내 삶을 속박하지 않겠느냐고? 글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새해 계획은 작심삼일, 기껏해야 작심 석 달이 아니던가. 봄이 되면 피트니스센터 회비는 기부금으로 바뀌어 있을 테고, 운동장을 뛰는 대신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현실은 원근법을 적용한 르네상스 회화보다는 지리멸렬해 보이는 현대 추상 회화를 닮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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