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만에 ‘가해국’ 된 이스라엘…‘제노사이드 혐의’ 유엔 법정 피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 혐의로 유엔 최고법정인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피소됐다. 제노사이드 피해국이었던 이스라엘이 75년 만에 ‘가해국’으로 피소된 것이다.
3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말살하려는 의도를 갖고 집단학살을 자행했다”며 ICJ에 이스라엘을 제소했다. 남아공은 ICJ에 제출한 소장에서 이스라엘이 “구체적인 의도”를 갖고 가자지구에서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며 “이는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른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밝혔다. 남아공은 “제노사이드 협약에 서명한 국가로서 이런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을 의무가 있다”며 ICJ가 가자지구에서의 군사작전을 즉각 중단하라는 임시 명령을 이스라엘에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제노사이드는 인종이나 민족, 국적, 종교 등을 이유로 특정 집단을 체계적으로 박해하고 말살하는 행위를 말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대표적이다. 유엔은 1948년 인종청소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제노사이드 협약(제노사이드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고, 이스라엘 역시 이 협약에 가입했다.
이 사건에 대한 심리가 시작되면 판결까지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아공 측이 요청한 임시 명령은 이르면 몇주 안에 내려질 수도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ICJ는 국가 간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창설된 유엔 최고법원이다. ICJ의 판결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며, 당사국이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원칙적으로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받게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힘의 논리에 의해 재판 결과가 무시되기도 했다. ICJ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한 달여 뒤인 2022년 3월 러시아에 침공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이를 계속 무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남아공의 ICJ 제소를 “비열한 명예훼손”이며 “근거 없는 소송”이라며 반발했다. 이스라엘 외교부는 남아공이 ‘하마스 소탕’을 내세운 이스라엘의 전쟁을 ‘제노사이드’와 연결짓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며 “남아공이 이스라엘 국가의 파괴를 요구하는 테러조직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팔레스타인 정부는 환영의 뜻을 밝히며 “ICJ가 팔레스타인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즉시 취하고, 이스라엘에 공격 중단을 촉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남아공은 과거 이스라엘과 가까운 국가 중 하나였으나, 최근 몇년간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이스라엘을 앞장서 비판하고 있다. 지난달 남아공 의회는 가자지구에서 휴전이 이뤄질 때까지 남아공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하고 이스라엘과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남아공 정부는 지난달에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벌인 전쟁범죄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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