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아이디어 ‘제3자 배상’ 윤 정부 진퇴양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두고 윤석열 정부가 진퇴양난에 빠진 모양새다. 일본 가해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한국 대법원 확정판결이 이어지면서, 정부가 제시한 ‘제3자 변제’를 통한 해결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탓이다. “한국 정부가 해결하라”는 일본 쪽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생뚱맞게 일본 쪽 책임을 대신 떠맡고 나설 때부터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다. “내가 책임진다”며 밀어붙였던 윤 대통령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대법, 재차 “일제 지배는 불법이므로 전범기업 배상 책임”
대법원 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2023년 12월28일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과 히타치조선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3건에 대해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소송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 가해 전범기업 쪽은 일부 원고가 이미 일본 법원에서 같은 내용의 소송을 제기해 패소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같은 소송에서 일본 쪽과 다른 결정이 나올 수 없다는 취지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일본 쪽 판결은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어,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며 “이런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날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한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판결 취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당시 대법원은 △일제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이며 △강제동원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불법행위이므로 △가해 전범기업은 배상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둘째, 피고 쪽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처음 인정한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을 소멸시효의 기산점(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살아 있는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 경우 소멸시효(3년)인 2015년 5월 이후 제기된 소송은 모두 각하돼야 한다. 하지만 대법원 2부(주심 이동관 대법관)는 2023년 12월21일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제철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2건에 대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소멸시효 기산점을 “2018년 10월 대법원 확정판결 이후”로 명시했다. 2012년 판결은 단순히 소송 가능성의 문을 열어준 것일 뿐, 2018년 판결 이전까지는 “피고를 상대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사실상의 장애 사유가 있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2018년 10월 이후 제기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배해상 소송 사건만 230여 명이 제기한 60여 건에 이른다. 그 전에 제기된 소송도 소멸시효와 무관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법원은 배상금과 별도로 판결 이행을 늦추는 데 따른 지연이자율을 연 12%로 못박았다. 일본 전범기업이 책임져야 할 배상액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니, 지금은 한국 정부가 감당해야 할 몫인가?
관방장관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
앞서 정부는 2023년 3월6일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해법으로 국내 재단(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배상금(판결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제3자 변제’ 방안을 공식 발표했다. 일본 정부의 사죄와 가해 전범기업의 배상 참여 등은 배제됐다. 가해국과 가해기업은 뒷짐 지고 있는데, 피해국 법원의 판결을 피해국 정부가 뒤집은 꼴이다.
애초 정부는 일본 쪽의 ‘성의 있는 호응’을 장담했지만, 일본 쪽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외교부는 재단 쪽과 함께 피해자와 유족에게 ‘위로금’(판결금)을 받으라고 설득했다. 일본 쪽 사죄와 배상 참여 없이는 정부가 주는 돈을 받지 않겠다고 끝까지 거부한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해선 배상 판결금만큼 법원에 공탁을 시도했다. 법원은 “피해자의 합의 없는 공탁은 불가능하다”고 판시했다. 이후 정부는 아무런 후속 대응을 하지 못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올 때마다, 정부가 짊어져야 할 부담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게 됐다.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 정부 대변인 격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12월21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한-일 청구권 협정(1965년)에 명백히 반하는 것으로 지극히 유감”이라며 “한국 쪽에 항의했다”고 밝혔다. 과거사 문제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쪽의 일관된 입장이다.
하야시 장관은 외무상 시절이던 3월에 한국 정부가 ‘제3자 변제’ 방식을 발표했을 때, “다른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할 경우 한국의 재단이 지급할 예정이라는 취지를 이미 표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맞춰 한국 정부가 대응해나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행 책임이 한국 쪽에 있다는 주장이다. 과거사 문제의 법적 쟁점에 천착해온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애초 ‘제3자 변제’ 방식을 내놓지만 않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가해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으로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이행하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강제매각은 한-일 관계 파탄을 뜻한다’는 일본 쪽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 했다. 피해자 설득도 실패했고, 공탁은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지금 정부로선 아무런 대책이 없을 것이다.”
정부가 기업 출연 강제하면, 기업도 출연시엔 위법 소지
현재 소송 계류 중인 사건은 하나둘 확정판결이 나게 될 것이다. 이들 판결에 대해 ‘제3자 변제’를 할 자금은 없다. ‘민간기업의 자발적 출연’을 강조하지만, 권한도 없는 정부나 재단이 기업에 기금 출연을 요청하면 법적 문제(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등)가 될 수 있다. 기업 쪽도 ‘의무 없는 일’을 하면 ‘배임’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 대법원이 2022년 7월 외교부의 요청에 따라 미뤄둔 전범기업 국내자산 강제매각 관련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 다가온다. 일본 쪽은 압박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어쩔 텐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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