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기자 2023. 12. 3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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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은 여전히 문학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몰라서 그렇지 문학에서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새롭지 않으면, 즉 기존의 것을 단순 되풀이하면 작품이 주는 감동은 현저히 떨어진다. 때에 따라서는 우리 인식과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낡은 것이든, 현실 조건 또는 역사라는 불빛에 비춰봐야 한다. 지금은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위조지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군가 작정하고 위조한 게 아닌데도 시간을 지나오면서 진품의 자격에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럴 때 적잖은 사람들은 진품이었던 과거를 역설하거나 본래의 순수한 의도를 강조하며 항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품이 아닌 것을 진품이라고 인장을 찍어줄 순 없는 노릇이다.

문학에서 새로움이 강조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학이야말로 구습을 깨고 나아갈 수 있는 적임자기도 하며 또 문학은 그래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문학이 언어를 통해 존재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문학이 언어를 ‘다루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이 언어 위에 군림하는 것 같은 이런 상투적 인식이 그동안 문학의 허위와 자기 낭만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언어를 다루고, 조정하고, 개발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문학은 언어에 의해 간신히 성립하고, 언어의 존중을 통해 빛나며, 언어 앞에서 아뜩한 한계를 경험한다. 즉 문학은 자기 언어의 유한성을 깨달아야 그나마 가능해진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전개된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문학은 언어 위에 군림하며 통제하고, 언어를 이용하면서 자신의 ‘새로움’을 뽐내왔다.

문학 언어, 민중의 언어와 다른 길

이제 문학의 새로움은, 인식과 상상력, 그리고 시대가 가져야 할 꿈과 깊은 그리움에 좌우되는 게 아니다. 나아가 우리가 잃어버린 땅, 즉 대지를 회복하려는 열정에 의해서도 규정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나날이 기괴해져가는 우리 현실에 대한 무기력한 반응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극단적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물질 개벽’에 보조를 맞춰야 새로움을 잃지 않는 거라는 병리적인 모습까지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더욱더 언어를 이용하고 개발한다. 이쯤 되면 문학 자체가 인공지능이 된 것은 아닌가 의아해할 수도 있다. 이런 의심과 지나친 예민함이 일부라도 사실이라면 어쩌면 문학은 자신이 갈 길을 스스로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언어는 이제 공동체, 민중의 언어와 길을 달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민중이 어디에 있다고 민중 타령이냐고 되묻는다면 순간 말이 궁해지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요즘 식자들에게 회자되는 브뤼노 라투르의 얇은 책자를 한 권 읽었는데, 라투르가 제기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깊은 공감을 했다. “우리는 근대인인가, 대지인인가?” 라투르가 말하는 ‘대지’는 단순히 물리적인 땅만은 아니지만 그 땅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 스스로 말하듯이 현재의 위기를 개념화하기 힘든 것은 “모두가 함께 겪는 몹시 고통스러운 시련, 즉 땅을 박탈당하는 시련에서 나오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투르의 강고한 유럽중심주의를 가지고 진정한 ‘대지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일찍이 고 김종철 선생은 우리의 실존이 처한 엄청난 위기와 병리적 현상, “언어가 사라지고, 토착 내지 전통문화가 위축되고, 그 결과 문화적 다양성이 소멸되어”(<땅의 옹호>)가는 현상을 대지의 유실에서 찾은 적이 있다. 즉 문학의 언어는 바로 땅의 언어, 민중의 언어에 밑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깊이와 높이가 한없이 초라해지기 마련이고,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문학은 새로움이라는 이름으로 언어를 난폭하게 다루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결국 ‘문학’과 ‘언어’가 아니라 작가·시인의 명성과 인지도, 즉 상품만 남긴다. 그리고 이것은 극단적인 자본주의 상품경제 시스템이 바라고 꾀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 존중 안하면 새로움은 없어

문학이 언어를 존중하지 않고 그 심연 속으로 깊이 들어가볼 마음을 갖지 않으면서 열매만 탐한다면 언어는 결코 새로워지지 않는다. 토양이 좋아야 좋은 열매가 맺히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언어가 타락을 넘어 쓰레기가 되는 세상이며 모두 표현의 ‘자기’ 자유만 외치는 세상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민중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엉터리 물음이며 허무적이다. 그것은 자신부터 새로워질 마음이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닌데 만일 우리 자신부터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현실의 근본적 변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대신 겉만 번쩍거리는 새로움은 더욱 번식할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이 문학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지금은 책임을 스스로 감경하고나 있을 상황이 아니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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