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전세보증 줄이자 … 세입자 "나가겠다" 집주인 "줄돈 없어"
"7채를 전세 놓으면서도 세 한 번 안 올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가 보증 한도를 축소하니 세입자는 깡통전세라며 나가겠다네요. 집을 팔아서라도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요즘 빌라가 팔리나요. 한평생 양심적으로 살았는데 정부가 전세사기꾼으로 몰아갑니다."
서울 중랑구에서 빌라를 세놓고 있는 은퇴자 김 모씨는 "너무 억울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전세사기로 빌라 기피가 확산된 데다 정부가 전세사기를 막겠다며 전세보증보험 한도를 대폭 축소하면서 전국 빌라 임대인은 '패닉' 상태다. 빌라 주인들은 "정부가 전세사기범을 잡겠다면서 선량한 집주인을 잡고 있다"며 빌라 시장 정상화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호소했다.
서민주거 대표 격인 빌라(연립·다세대) 시장이 얼어붙은 데 치명타를 가한 것은 전세보증보험 개편이다. 정부는 2023년 5월 전세사기를 예방하겠다며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기준을 강화했다. 종전에는 공시가격 인정비율이 150%였는데 이를 140%로 낮추고, 전세가율은 100%에서 90%로 강화했다. 강화된 전세보증보험 기준을 적용하면, 빌라는 전세보증보험 최대 한도가 공시가의 150%에서 공시가의 126%(공시가의 140%×90%)로 대폭 낮아진다. 예를 들어 공시가 1억원인 빌라는 기존 전세보증보험이 1억5000만원까지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1억2600만원밖에 안 된다.
신규 전세계약에만 해당되던 보증제도는 올해 1월 1일부터 갱신계약에도 적용된다. 즉 올해부터는 신규·갱신 건 모두 전세 시장에 강화된 보증보험이 적용된다. 세입자는 HUG의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전세 매물 위주로 찾기 때문에 사실상 전세보증보험 한도 금액은 전세보증금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보증 한도가 내려가니 세입자 우위 빌라 시장에서 임대인은 전세금을 강제로 낮춰야 하는 상황이다. 시세가 자연스럽게 떨어져서 발생한 역전세이면 모르겠는데 정부가 전세보증보험 한도를 축소하면서 발생한 인위적인 역전세다. 임대인이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다.
김씨는 "이 동네에서 방 3개, 화장실 2개짜리 집을 4년 넘게 2억1000만원에 전세를 줬는데, 갑자기 126%가 적용되면서 올해부터는 1억3000만원에 계약할 판이다. 시세가 있는데 정부 규제에 맞춰 전세보증금을 설정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토로했다.
아파트와 달리 빌라는 공시가가 시세와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런데 전세보증보험 기준이 되는 공시가를 150%에서 126%로 낮춘 데다 주택 공시가도 내려가니 보증 한도는 더욱 쪼그라들게 된다. 담보인정비율도 100%에서 90%로 줄어 빌라 시장 대부분은 역전세가 날 상황이다.
매일경제가 부동산 중개업체 집토스에 의뢰해 2024년 전세계약이 만료되는 수도권 연립·다세대 주택 12만2087건을 분석한 결과 66.3%(8만933건)가 동일 보증금으로 반환보증 가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23년 공시가격 기준으로 반환보증 가입 가능 여부를 추산한 수치다. 서울은 전체 계약 만료 건의 63%, 경기 66.6%, 인천 86.1%가 현재 보증금보다 전세가를 낮추지 않으면 보증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다.
서울에서는 금천구(87%)의 보증 가입 불가 비율이 가장 높았고, 인천은 계양구(92%), 경기는 이천시(87%)의 가입 불가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다수 발생한 서울 강서구는 85%, 인천 미추홀구는 75%가 동일 보증금으로 전세계약 갱신 때 보증 가입이 어려운 것으로 분석됐다.
강희창 전국비아파트총연맹 공동회장은 "빌라 3~4채만 있어도 1억원 넘는 돈을 내줘야 하는데, 1억원씩 현금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면서 "정부가 임대인에게 폭탄을 던졌다"고 토로했다.
빌라 임대인이 역전세를 막기 위해 기존 빌라를 헐값에 처분하면서 종종 세입자도 내쫓기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임대인 박 모씨는 "다른 집을 팔아 해결하려는데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어 세입자를 내보냈다"고 말했다.
집을 팔 수 있으면 다행이다. 더 큰 문제는 등록임대사업자다. 등록임대사업자도 임대보증금 반환보증 가입 요건을 강화한다. 강화된 요건은 2024년 7월부터 적용하고, 기존 등록한 임대주택은 2026년 7월 1일 이후 적용한다. 임대사업자는 보증보험 가입이 필수여서 무조건 이 요건을 맞춰야 한다. 역전세로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면 빌라 집주인은 집을 팔겠지만 임대사업자는 집을 팔 수도 없는 처지다. 아예 퇴로가 막힌 것이다.
임대사업자 양 모씨는 "집을 강제로 팔면 과태료가 3000만원인데, 5000만원 보증금을 내주려고 3000만원 과태료를 무는 게 말이 되냐. 법을 만들었으면 숨 쉴 구멍은 줘야지, 어떻게든 해결하려는데 집도 못 팔게 해놓고 전세보증금을 낮추라 하니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지적했다.
보증보험 한도 축소는 전세사기의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세사기는 시세를 부풀려서 전세금을 과도하게 받은 뒤 잠적하는 사례가 많다. 고준석 제이에듀투자자문 대표는 "중립적인 감정평가사를 선정해 빌라 시세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저당이 설정된 건물인데도 시세를 초과해 전세보증금을 받거나 근저당이 설정된 사실이 제대로 안내되지 않아 전세사기를 당하는 일도 많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전세사기도 결국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안심할 수 있는 공인중개사를 양성하고, 전세계약 단계에서 근저당 확인이나 서류 확인 등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정보를 거래 당사자가 모두 확인하는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빌라에 보증보험 한도를 축소하는 것은 빌라 시장 특성을 무시한 정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강 공동회장은 "빌라는 매매 수요가 거의 없어 전세가와 매매가가 붙어 있다"며 "그런데 이를 다 '깡통전세'라고 하며 전세 보증비율을 확 낮추는 것은 정부가 빌라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역전세를 발생시켜 오히려 전세사기를 만드는 꼴"이라고 말했다.
빌라 시장 초토화는 궁극적으로 서민 주거 사다리를 붕괴시킬 수 있다. 빌라 기피는 아파트 전세 수요를 키워 아파트 전셋값을 올리는 요인이 된다. 고 원장은 "저소득층이 많이 찾는 지역, 1인 가구가 많이 사는 지역은 전세보증 한도를 늘려주거나 정부가 보증료를 부담해주는 식의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며 "빌라 시장이 위축되면 결국 서민은 더 높은 주거비를 부담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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