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가 '기안 팔십사'라고 부르는 기안84의 MBC 정복이 의미하는 것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강호의 의리만큼 땅에 떨어진 연예대상에 대한 관심이 2023년에는 그나마 기안84로 인해 이슈가 됐다. 기안84의 대상 수상 여부는 한 해 동안 밈에 가까웠다. 그가 보여준 <나 혼자 산다>와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시리즈에서 보여준 진정성과 하드캐리, 시청률과 화제성으로 놓고 봤을 때 사실 경쟁자가 방송3사를 통틀어도 전무한 너무나 독보적인 행보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의 수상 여부에 관심과 촉각을 세운 진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을 안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기인했다. 코미디언도 아니고, 전업 방송인이라고 정의하기도 까다롭고, MC도 아니고, 범인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그에게 아무리 집안 잔치라고 해도 지상파 연예대상 트로피를 준다는 것을 시청자들 또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최근 연예대상을 앞두고 이경규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예능총회'라는 이름으로 김구라를 불러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올해 유튜브 진출부터 <코미디로얄>이란 도전까지 활발한 호기심 속에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40년 경력의 예능 대부지만, 대략 10년차 방송인이자, 유력 대상후보 기안84에 대해서는 기안 팔십사로 부를 정도로 무관심했다. 활약상은 고사하고 동료로서 존재 자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런 점이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가 지상파 예능에 대해 갖는 이미지다.
다행히, 혹은 당연히,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무난하게 기안84가 영광을 안았다. 흐름을 거스를 지상파 특유의 권위의식이나 내부 사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오히려, 유재석을 비롯한 다른 후보가 있음에도 전현무와 박나래 등이 시상식 중 기안84 대상 수상을 빌드업을 하는 색다른 광경은 후보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방송사에 변화를 촉구하고 흐름을 꼭 받아들여달라는 당부에 가까웠다.
같은 의미에서 길고 긴 시상식 와중에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공로상 시상자로 나온 이경규였다. 그는 자신의 채널에서 말한 내용을 그대로 생방송 중에 쏟아냈다. MBC에 대한 서운함은 물론, 변화를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 듯한 감정을 스탠드업 코미디의 방식으로 희화화했다. 프로듀서 특별상을 받은 김구라 또한 새 프로그램 런칭 의지, 안일한 도전 정신 등 지적했던 내용을 그대로 수상소감에 녹여냈다.
사실, 유튜브에서 이경규와 김구라가 나눈 주된 이야기는 40년 경력의 코미디, 예능 대부인 이경규가 김구라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배움이었다. 기성 방송보다 솔직함과 진정성을 내세운 콘텐츠들이다보니 예능인, 희극인, 제작진의 고민과 현재를 지켜볼 수 있고, 이를 실제로 방송이나 다른 활동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언행일치가 선택과 취향의 시대에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재미다.
이는 중견이라 할 수 있는 이상준, 이용진 등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인지도 높은 공개코미디 스타 이상준은 새로운 채널도 만들고, <코미디로얄>, 대니초의 유튜브 채널 등을 비롯해 메타코미디클럽과도 교류를 벌이며 앞으로의 코미디를 모색하는 배움의 과정을 꽤나 진정성 있게 여러 자리에서 보여준다. 탈방송 유튜브 예능의 시대를 열었던 이용진 또한 그 이후 본격 벌어진 'TV스타 인베이전'에 대한 대응을 어려움을 고백하며 분투하고 있음을 밝힌다.
승승장구하던 메타코미디클럽은 미국식 스탠드업 코미디를 골조로 삼는 새로운 코미디 문화를 넷플릭스, 카카오와 함께 대대적으로 펼치려다 최초로 좌초에 가까운 역풍을 맞았다. 명맥을 이어오던 tvN <코미디 빅리그>마저 오랜 어려움 끝에 사라지면서 기존 공개코미디 선수들은 길을 잃었고 <개콘>은 공개코미디에 대한 우려를 증빙하는 예시를 하나 더하는 중이다. 다시말해 2023년은 각자의 자리에서 무조건 변화는 필요한데, 그 다음의 해답을 각자 활발히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다.
MBC의 기안84 대상 수상은 그런 점에서 다시 한 번 변화의 속도를 당기는 촉매가 될 것 같다. 예능의 장르적 개념이 '웃음'을 넘어선 지 10여 년 지나면서 느리든 빠르든 선수들이, 제작진, 방송사 모두 변화를 마주하고 각자의 속도로 임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곽튜브가 최근 이용진의 채널에서 말했듯, 유튜브 특유의 날것과 진정성을 캐릭터, 능력, 노하우, 자본까지 이미 갖춘 연예인과 프로덕션이 점령하면서 웹예능의 판도 또한 달라졌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2023년 예능을 정의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다음 예능의 패러다임, 다음 코미디의 문화에 대한 고민을 공개적으로 대중과 함께 나눈다(이 부분에서 가장 앞선 곳도 역시나 에그이즈커밍이다). 변화를 위해 지금까지 미국식 코미디, 궁극의 진정성, 스케일업 한 예산, 일반인과 인플루언서의 경계 등등 예능의 장르적 특성과 영역을 넓혀만 가는 방향으로 뻗어왔다. 그런 와중에 미니멀로 방향을 튼 나영석 사단이나 유재석 1인 콘텐츠인 <핑계고>, MBC 최우수 프로그램상을 수상한 <태세계>시리즈는 이 시점에서 하나의 힌트처럼 반짝인다. 변화는 당연하다만 영원해야 하는 것과 변화를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한 재정의, 숙고가 필요한 2024년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MBC,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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