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과 꿈의 이유를 생각한다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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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화 | 괴산 숲속작은책방 대표엄동설한 매서운 기운에 인적이 뚝 끊겨버린 겨울 책방에서 부부는 동굴 속 곰처럼 뱀처럼 잔뜩 웅크려있다.
지난 한해 책방은 퍽이나 조용했고 연말결산은 초라하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작은 책방의 정산 장부가 빈곤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전히 쉬지 않고 많은 일을 해왔는데도 마음속 결핍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뭘까.
막막한 맘으로 내 안의 우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웃 어르신이 책방 문을 두드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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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화 | 괴산 숲속작은책방 대표
엄동설한 매서운 기운에 인적이 뚝 끊겨버린 겨울 책방에서 부부는 동굴 속 곰처럼 뱀처럼 잔뜩 웅크려있다. 지난 한해 책방은 퍽이나 조용했고 연말결산은 초라하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작은 책방의 정산 장부가 빈곤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전히 쉬지 않고 많은 일을 해왔는데도 마음속 결핍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뭘까. 답을 찾아 지난 시간을 떠올려보니 내 안에 징징거리는 아기가 살고 있었다.
입으로는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은 아기처럼 울었다. 세상이 나아지리라는, 지역이 소멸하지 않을 거라는, 책을 기반으로 한 인문의 언어가 도도하게 물결치리라는 희망 따위는 없다고 마음은 내내 투정을 부렸다. 막막한 맘으로 내 안의 우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웃 어르신이 책방 문을 두드리셨다.
한해 방문객 백만명을 찍으며 괴산 관광의 일등 공신이었던 산막이옛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분이다. 좋았던 시절도 잠시, 내리막길을 걸으며 관광객이 급감한 현실을 한탄하던 그분이 조심스레 ‘문화’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수십억 예산을 들여 새로운 조형물을 설치해도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원점인 지역 관광의 위기. 해답은 일회성 예산이나, 지원만 바라보는 안일함이 아니라 이곳에 살며 이곳을 지켜가는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의 힘에 있지 않을까 의견을 구하신다. 문화가 당장 상인인 자신에게 밥을 먹여주지는 않겠지만 여태껏 살아온 삶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다 보면 지역의 터전이 탄탄해지지 않겠느냐고, 지역소멸을 외치기 전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책방과 함께 읽고 쓰는 모임을 해보고 싶은데 군이나 면의 지원을 받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지 물어보신다.
대화를 나누며 도로 곳곳에 나부끼는 괴산군 2024년 사업 현수막들을 떠올려본다. 지방소멸대응기금 113억원, 농촌공간 정비사업 280억원, 지역활력타운 조성사업 242억원, 혁신단지 시범사업 251억원. 수십, 수백억대 사업 예산을 확보했다며 성과를 내세우는 깃발들이 요란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얼마만큼의 돈이 이웃 어르신과 내 삶의 질을 높여주고 행복감을 고양해줄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지역 주민 한사람이 내 삶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 문화의 힘으로 소멸을 버티어보겠다 할 때 필요한 예산은 얼마일까? 그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는 예산 항목은 어디에 존재할까? 아니, 그보다 지역주민 한사람 한사람의 이런 마음을 효과적인 지역소멸 대응 정책으로 여겨줄 행정은 있는 걸까?
농촌의 생존을 관광객들에게만 의존하고 모든 정책이 도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목표를 세우는 것에 급급할 때, 실상 주민들의 삶은 소외되기 쉽다. 주민 스스로 충족한 삶을 살 수 있을 때 결국 지역주민도 행복하고 관광이든 이주든 도시민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밥과 고기를 주지 않지만 코끝을 맵게 하고 내 볼을 때려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차고 시린 겨울바람 같은 문화의 힘을 느껴보게 해줄 행정의 힘, 시민의 힘은 어디 없을까?
책방을 찾아온 어르신과 대화하며 천천히 내 안의 우는 아기를 달래본다. 오래전 작은 조짐에서도 희망의 목소리를 듣던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이곳이 아니면 저곳에 미처 피지 못한 꿈들이 우리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새벽마다 땅을 밟는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피어나는 꽃들의 희망을 만나리라, 그렇게 여기며 시골로 향했던 가볍고 희망찼던 발길을 기억했다. 나를 살게 하는 힘은 현수막에 적힌 숫자들이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내 삶과 꿈의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는 새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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