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는 왜 이정후에게 거액 1억 달러를 안겼을까
(시사저널=김형준 SPOTV 메이저리그 해설위원)
긴 머리를 휘날렸던 아르헨티나 축구대표팀의 공격수 클라우디오 카니자는 '바람의 아들'로 불렸다. 카니자는 100m를 10.2초에 달릴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데뷔 시즌에 73도루를 기록한 이종범이 같은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가 바람의 아들이다 보니, 이정후는 '바람의 손자(Grandson of wind)'가 됐다. 미국의 한 기자는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이정후의 별명을 가장 멋진 별명으로 뽑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정후는 지독한 바람으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구장에서 뛰게 됐다. 이정후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역풍으로 인해 홈런이 잘 나오지 않는 오라클파크에서 바람과 싸워야 한다.
1년 전 보스턴이 일본의 요시다 마사타카와 5년 9000만 달러에 계약했을 때 오버 페이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이정후는 요시다를 넘어서는 6년 1억1300만 달러 계약을 따냈다. 아시아 리그에서 뛰고 진출한 타자로서 최초의 1억 달러 계약이다. 요시다는 메이저리그 진출 전에 135개 홈런을 날리고 장타율 0.538을 기록했다. 이정후는 65개 홈런과 장타율 0.455를 기록했다. 요시다가 수준이 더 높다고 평가받는 일본리그에서 더 좋은 장타력을 보여준 것이다.
오타니 놓쳐 당황한 샌프란시스코가 패닉 바이?
그럼에도 이정후가 요시다보다 더 좋은 계약을 따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요시다는 코너 외야수(좌익수 또는 우익수)로서 수비력이 크게 떨어지고 스피드도 부족하다. 반면 이정후는 스피드가 평균 이상이고 폭넓은 중견수 수비가 가능하다. 팀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요시다보다 많다.
두 번째는 나이다. 요시다가 만 29세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반면 이정후는 25세에 진출했다. 이정후는 요시다와 달리 성장할 여지가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더 수준 높은 선수들과 대결하면서 발전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선배인 김하성(25세 진출)과 류현진(26세 진출)이 증명했다.
하지만 KBO리그에서 7년 동안 기록한 홈런 수(65개)가 애런 저지의 한 해 홈런 수(2022년 62개)와 비슷한 이정후에게 1억 달러를 넘게 준 것이 옳았냐는 논란은 미국 현지에도 존재한다. 이정후에게 1억 달러는 높은 기대와 함께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됐다.
이정후가 입단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명문 구단이다. 8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LA 다저스보다 한 번 더 많은 내셔널리그 2위에 해당되며, 통산 승률 0.536은 뉴욕 양키스 다음으로 좋다. 하지만 최고의 전성기는 1957년까지의 뉴욕 시절이었다. 1958년 샌프란시스코는 다저스와 함께 서부로 옮겨왔다. 하지만 인기도 성적도 다저스에 밀렸다. 연고지 이전 후 다저스가 1988년까지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1993년 배리 본즈를 품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 샌프란시스코는 오라클파크를 개장했다. 본즈가 까마득한 타구를 날려 우측 관중석 뒤 바다에 빠뜨리는 홈런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장면이 됐다. 하지만 본즈가 아이콘이었던 기간은 길지 못했다. 홈런 신기록을 세우자 금지 약물 논란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본즈는 등 떠밀려 은퇴했고, 오라클파크의 바람을 뚫을 수 있었던 유일한 타자는 사라졌다.
2010년에 등장한 버스터 포지는 가뭄의 단비였다. 포지는 신인왕이 됐고, 56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선물했다. 포지가 2011년 주자와 충돌해 큰 부상을 입자 메이저리그는 포수 충돌 방지 규정을 만들었다. 2012년 포지는 내셔널리그 포수로는 70년 만에 타격왕이 됐고, 샌프란시스코는 또 우승했다. 2014년 세 번째 우승을 추가하자, 포지의 샌프란시스코는 '짝수해의 기적'으로 불렸다.
2021년 샌프란시스코는 팀 역대 최고 기록에 해당되는 107승을 올리고 다저스의 9년 연속 디비전 우승을 막았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포지가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포지는 에너지 음료 사업에 투자해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아빠로 살기 위해 이른 은퇴를 택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아이콘을 잃었다.
라이벌 다저스가 스타군단으로 거듭나는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스타를 찾아내지 못했다. 6개월 동안 거의 매일 경기가 열리는 야구는 구장을 방문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줄 스타의 존재가 중요하다. 한때 내셔널리그 신기록에 해당하는 530경기 연속 매진이 이어지기도 했던 샌프란시스코는 2016년만 해도 4위였던 관중 순위가 올해 17위로 떨어졌다.
1년 전 샌프란시스코는 지역 출신인 애런 저지를 잡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파격적인 9년 3억6000만 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양키스의 제시액과 같았고, 저지는 양키스에 남았다. 스타에 목마른 샌프란시스코는 이번에도 오타니 영입에 총력을 다했다. 하지만 오타니는 동일한 제안의 다저스를 선택했다. 오타니는 다저스를 더 좋아했고, 월드시리즈 우승에 다저스가 더 가깝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저스가 오타니와 계약하고 3일 후, 샌프란시스코는 이정후와 계약했다. 일각에서는 오타니를 놓쳐 당황한 샌프란시스코가 패닉 바이(공황 구매)를 했다는 평가를 내놓았지만, 이정후는 오타니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샌프란시스코의 영입 목표였다. 중견수를 맡길 좌타자가 필요했던 샌프란시스코에는 이정후가 KBO리그 최고의 스타이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었다. 문제는 이정후가 받은 1억1300만 달러 계약이 포지에게 준 1억6700만 달러에 이은 팀 타자 역대 2위이자, FA 타자에게 준 최초의 1억 달러 계약이라는 것이다.
이치로가 롤모델이었던 이정후, 등번호도 51번
메이저리그에는 홈런왕이 안타왕보다 더 좋은 차를 탄다는 말이 있다. 홈런왕의 스타성은 안타왕을 압도한다. 하지만 딱 한 번, 안타왕의 인기가 홈런왕을 압도했던 적이 있다. 스즈키 이치로다. 역대 두 번째로 신인왕과 리그 MVP를 동시에 차지한 일본의 이치로는 4년 차 시즌에는 262개 안타를 날려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안타 기록을 84년 만에 경신했다. 본즈가 홈런으로 지배하고 있던 그때, 이치로는 정교한 타격, 완벽한 수비, 뛰어난 베이스러닝으로 본즈의 대척점에서 본즈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어렸을 때부터 이치로를 좋아하고 이치로가 롤모델이었던 이정후는 키움 히어로즈에서 이치로의 등번호 51번을 달았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51번을 단다.
샌프란시스코가 이정후에게 준 1억 달러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샌프란시스코는 그냥 잘하는 선수가 아닌 스타가 필요했고 이정후를 택했다. 이정후는 홈런을 치지 않아도 스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정후의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는 "이정후가 메이저리그에 K팝 신드롬을 몰고 올 것"이라는 말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필요한 건 신드롬이다.
바람의 손자인 이정후가 오라클파크의 바람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바람을 이겨내는 큰 타구를 날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방해할 수 없는 탄도의 날카로운 타구를 날리는 것이다. 오라클파크는 안타왕이 더 좋은 차를 탈 수 있는 구장에 해당한다.
이정후는 등번호 51번을 이치로의 번호가 아닌 자신의 번호로 만들 수 있을까. 엄청난 부담과 함께 시작하는 도전이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아버지의 이름에 도전한 길이었기에, 더 기대되는 이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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