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가 연회를 사랑할 때 생기는 일[노원명 에세이]
고대 그리스 민주정 지도자 페리클레스에 대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기술이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57년부터 429년까지 아테네를 공식 통치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약 40년간 아테네의 일인자였다고 한다. 최소 20년 이상 최고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연회 같은 모임과 담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페리클레스는 참주나 독재관이 아니었다. 그는 민주정의 지도자였다. 다수가 “그만 내려오라” 하면 내려와야 하는 것이 민주정이다. 다수의 여론을 움직이는 것은 소수 정치 인플루언서들이다. 이들 인플루언서들과의 네트워킹이 중요하다. 그 네트워킹이 끈끈해야 일이 굴러가고 정치 수명이 늘어난다. 그들과 ‘와인 한 잔’ 하는 건 노는 게 아니라 중요한 정치 행위다. 페리클레스는 그렇게 안하고도 수십 년을 버텼다.
그러나 모든 지도자가 페리클레스처럼 할 수는 없다. 페리클레스는 연설로, 비전으로, 그리고 인격적 매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타고난 천재였다. 그 정도 탁월함이 있으면 ‘연회 스킨십’은 없어도 된다. 그 시간에 비전에 골몰하는 편이 훨씬 역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천재들은 그렇다.
물론 연회를 안 갖는다고, 싫어한다고 다 페리클레스이거나 천재인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혼밥 바보’들도 있다. 그들은 에너지가 달리는 사람들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고 귀찮고 설복할 자신이 없으면 늘 똑같은 사람들과 막걸리나 마시게 된다. 천재는 못되지만 사람을 대하는 열정만큼은 타고난 대부분의 지도자는 통치를 위해 연회를 갖는다. 그걸 지도자의 스킨십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하다. 통치를 위해서인지, 통치를 빙자한 것인지.
세상에 그 자체로 달콤한 권력은 없다. 권력 행사에는 고뇌가 따른다. 권력자를 달콤하게 만드는 것은 주변에서 설설 기는 것이다. 설설 기는 사람들과 술이 만나면 마약이 된다. 왜 회사 부장들은 고작 삼겹살에 소맥을 타면서 툭하면 회식을 소집하는가. 마약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연회의 술잔은 영롱한 권력의 미약(媚藥)으로 채워진다. 지도자가 연회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사람을 좋아해서이지만 그가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이 타 주는 권력의 미약이다.
연회를 좋아하는 권력자가 위태위태한 것은 현실감각에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술 자리에선 다 친구이고 동지이다. 적의도, 계산도 내려놓는다. 애국의 건배사에 장삿속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나라의 수뇌들이 다 모여 ‘화이팅’을 외치는데 대한민국이 왜 화이팅하지 않겠는가. 술잔 속에 희망사고가 출렁댄다. 이 나라에서 가장 신비한 족속들인 재벌을 보라. 소맥을 내리면 소맥을 마시고 떡볶이를 내리면 떡볶이를 먹는다. 세상에 금테 두른 인간이 어디 있나. 세상은 평등해졌다. 지도자만 빼고.
잦은 연회가 부르는 두 번째 부작용은 질투다. 술이란 음료는 사람을 가린다. 같이 마셔서 기분 좋은 놈이 있고, 성가신 놈이 있다. 일단 성가시면 다음엔 아웃이다. 빠진 놈은 뒤에서 욕할 것이다. 매일 같이 마시는 멤버들도 배역은 다르다. 귀여운 배역과 만만한 배역. 귀여운 배역은 아부 건배사와 추임새 담당이고 만만한 배역은 잔소리 배출구 역할이다. 그게 누적되다 보면 두 배역 사이에 권력위계가 발생하고 심하게는 원수가 된다. 차지철과 김재규가 그랬다. 팀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연회이지만 연회만큼 팀정신을 해치는 장소도 드물다.
현실감각을 유지하면서, 질투를 유발하지 않고 연회를 주재할 수 있는 권력자는 타고난 천재다. 문제는 대부분 권력자가 자기가 천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잔에 소주, 맥주와 더불어 현실감각까지 말아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며 황송한 표정을 짓는 아랫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주먹다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한다.
남들처럼 해서는 위대해질 수 없다. 페리클레스는 위대해지기 위해 연회를 갖지 않았다. 어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회 사랑으로 남을 압도해 버린다. 그렇게 해서도 위대해 질 수 있을까. 과문한 탓으로 아직은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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