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툰 보다가 왔습니다, ‘행복한 철학자’와 크산티페의 티키타카
최근에는 서점에서 책을 골라서 읽기보단 스마트폰으로 독서 플랫폼의 추천도서를 훑어보거나, 그마저도 눈을 쉬게 한다는 핑계로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잠들어 버리는 일이 잦았는데요. 오랜만에 읽고 싶은 책이 생겨 기쁜 마음으로 주문해 받았습니다. 펼쳐든 책은 우애령 글, 엄유진 그림의 ‘행복한 철학자’.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건 SNS 덕분이었습니다. 엄 작가는 가족의 시트콤 같은 일상을 인스타툰으로 차곡차곡 그려냈고, 15만 팔로워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그 중 가장 사랑받는 등장인물이 소설가이자 상담가인 어머니와 철학자 아버지입니다. 특히 위트와 통찰력이 묻어나는 어머니의 화법과 아버지와의 대화에 독자들은 빠져들었고, 어머니가 쓰고 딸이 그린 ‘행복한 철학자’가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베스트셀러로 만들었죠.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이 있을까, 기꺼운 마음으로 엄유진 작가에게 서면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다음은 철학자와 아내, 딸의 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엄 작가가 인터뷰어 역할을 맡아 답변에 딸에게 이야기하는 친근한 말투가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Q. 먼저 이 책의 역사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책 소개를 좀 부탁드립니다. 딸 <행복한 철학자>는2007년 소설가인 어머니께서 철학 교수 아버지의 은퇴 즈음에 즐겁게 써서 선물하신, 일종의 ‘철학자 관찰기’와도 같은 에세이입니다. 오래 전 절판되었던 책입니다만, 가족 일상이야기를 다룬 <펀자이씨툰>이 받은 사랑과 응원에 힘입어2023년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출간하였습니다. 새로 나오는 책에는 펀자이씨툰과 삽화, 그리고 아버지의 편지를 더해 구성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자유롭게 놀리는 이 철학 에세이에 대한 한 독자분의 표현이 재미있더군요. ‘읽기 시작할 때엔 철학자 아내의 생활 고난기인 줄 알았는데, 다 읽고 보니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러브레터였다.’ 철학자의 아내 원래는 이 책의 제목을 <영감님, 정신차리슈>라고 하고 싶었습니다.(웃음) <행복한 철학자>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 들립니다. ‘행복’이라는 단어와 ‘철학자’라는 단어는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삶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고뇌하는 철학자였어도, 생긴 대로 살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꿈을 접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에서 행복했다고 보입니다. 철학자 제 눈에 이 책은 철학자를 지켜보던 한 사람이 철학자보다 더한 철학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입니다.(웃음) 아내는 ‘철학’이라는 단어에 거부감 대신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제가 세상을 향해 “철학이란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에 대한 궁극적 탐구이다.” 라고 아무리 힘주어 외쳐도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하자, 아내가 그것을 일상의 언어로 바꾸고 자신의 상황에 접목 시켜 철학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즐거운 방식으로 보여줬어요. 사람들이 말려들도록. (웃음)
Q. 철학자는 괴팍하고 고독하고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님이 그린 철학자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 같아요. 철학자의 아내 철학자가 작가의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웃음)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할 부분은 아니지만,(웃음) 한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까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문제가 돼. ‘철학자’가 만약 빈틈이 없는 규범적이고 깔끔한 사람과 살았다면, 질서가 없고 속 썩이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묘사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같이 깡패 같고 자유분방한 사람하고 만났을 때엔 같은 행동도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거야. 예를 들어, 남편이 갑자기 시골로 가서 며칠씩 지내고 오는 행동에 굉장히 속 썩는 배우자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로서는 철학자가 가끔 며칠씩 사라져 혼자만의 시간을 주니 너무 고마웠고,(웃음) 잘난 척 하는 내 태도를 반성해볼 수 있는 수양의 시간을 얻었으니 다행이고 그랬지.(웃음) 두 주일 후 시골에 다녀온 그에게 오리 안부를 물었다. 그는 오리가 잘 있다고 너무 믿고 싶어서 안부도 묻지 못하고 가 보지도 못했노라고 말했다 (중략) 나는 철학자에게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오리들이 어딘가에 잘 살고 있어서 이제 곧 청둥오리가 되어서 날아다니게 될 거라고... -행복한 철학자 中 Q. 철학자 아내로 사는 고충은 재미있으면서도 내 남편이라고 상상하면 주먹을 불끈하게 되는데요. 책에 담긴 철학자와 관련된 에피소드나 묘사 중에 반론하고 싶은 부분 있으세요? 철학자의 아내 반론? 반론할 것은 없습니다. <행복한 철학자>는 유사 이래 철학자가 가장 격조있게 묘사된 책이거든요.(웃음) 딸 아버지가 반론하실 게 없다고 어머니가 대답하셔도 되는 건가요?(웃음) 철학자 엄마 말이 맞아.(웃음) 철학을 피상적으로 보면 괴팍하고 무용하게 보일 수 있지만, 심화해서 깊이 들어가다 보면 결국 철학이야말로 상식과 맞닿게 되거든. 철학은 흔히 심각하고 심오한 것, 뭔가 굉장한 것으로 묘사되곤 하잖아. 근데 그걸 엄마가 라이트 터치하여 표현한 거야. “존경은 하지만, 별 거겠냐. 다 사람 사는 모습이지.”라는 마음으로. 난해하거나 복잡해 보이더라도 ‘So what?’ 하면서 나름의 방식대로 ‘철학자’에 대한 해석을 한 거야. 작가의 해석인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반론할 게 없잖아? 결혼함으로써 누가 누구를 구원한 것인가 하는 것은 다른 부부들처럼 영원히 결말이 나지 않을 미스터리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내 지론 하나는 확실하다. 철학자가 결혼했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철학자가 구원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이의가 있는 사람은 각 대학 철학과에 문의해주기 바란다. -행복한 철학자 中 Q, 책에서 자신을 크산티페(소크라테스의 부인은 남편의 언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악처의 대명사로 기록돼 있다)에 빗대시던데요. 반대로 엄 교수님께서 ‘행복한 크산티페’를 쓴다면 아내를 어떻게 묘사하시겠어요? 철학자 난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 버전보다는 ‘돈키호테와 둘시네아’ 버전으로 그릴 것 같은데?(웃음) 행복이란 단순한 즐거움이나 쾌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행복이란 어쩌면 자신만의 인생관과 가치관, 세계관이 어느 정도 정립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덕목일 수 있어.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보면 철학자의 아내가 행복하기 어려워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부부가 신뢰와 연민을 바탕으로 서로의 행동 밑에 깔려 있는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어느 정도 유기적인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거든. 나는 인생에 대한 회의를 자주 느끼고 세상에 혼자 있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자주 시달렸어. 네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래서 내가 운좋게 완벽한 구원의 여신상을 만난 것인가 하면, 또 네 엄마 입장에서는 자신이 성정이 강해서 그 시절 내가 아니었다면 결혼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거든. 우리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상대방을 새로이 발견하고, 서로의 발전을 응원하고, 또 서로의 모습에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했어. 그래서 네 엄마와 나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네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내가 있고, 나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네 엄마가 있어. 이런 측면에서, 내가 쓰는 ‘행복한 크산티페’ 속 주인공은 진정한 철학자로, 주어지는 시련들 속에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능력자로 묘사될 것 같아.
Q. 인스타툰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가 아버지와 어머니시잖아요, 두 분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분들 많아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딸 거동이 편치 않으셔 주로 자택에서 머무십니다. 어머니의 현재 기억 지속력은 1-2분 남짓이지만 즐거운 대화를 주고받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다양하면서도 지속적인 상실을 겪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지는 두 분의 우정과 정신적 가치들을 보며 저도 힘을 얻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근황이 어떠세요? 철학자의 아내 전 기억이 없어서 근황은 없고 꿈 같은 미래만 있습니다. 철학자 전 나이가 들어서 꿈 같은 미래는 없고 약간의 근황만 있습니다.(웃음) 우리는 삶을 정리해야 하는 노년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새로운 꿈을 꾸거나 희망에 차서 앞으로 돌진하기보다는, 그동안 살아온 것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어. 에릭슨이 얘기하는 ‘자아 통합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거지. 삶 전체의 문제를 재평가하고 의미를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야. 바둑에 비유하자면, 다 살고 보니 승패의 결과보다는 내 실력껏 능력껏 좋은 게임을 치뤄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내 삶에 더 남은 게 없더라도, 심지어 파멸되고 있는 느낌이 들더라도 내가 내 게임에 최선을 다했고 만족하기 때문에, 승패의 의미를 다른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패배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 왔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 다른 누군가한테 이겼냐 졌냐보다 내가 나로서 나답게 제대로 게임을 치뤄 왔다는 것, 남의 실수에 의존하거나 남을 속이는 꼼수를 쓰지 않는 태도로 살아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 네 엄마와 나에게는, 그날 그날의 의미가 중요했던 삶이었어. Q. <행복한 철학자> 독자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다면? 딸 어머니는 에세이 형식으로, 아버지는 편지글 형식으로, 저의 동화 형식으로 다르게 표현했지만 결국 소중한 이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구태의연한 공식처럼 느껴지는 가족 관계들이 창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책이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철학자의 일상 이야기가 철학과 일상의 거리감을 좁혀주는 계기가 된다면, 철학자의 딸로서 기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철학자의 아내 본심을 말해도 된다면 (웃음) 책도 아닌 걸 돈까지 내고 사서 읽어줘서 고마워요.(웃음) 책을 통해 몇 가지 지혜와 몇 번의 웃음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감사할 것 같아. 철학자 나는 이 책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철학의 문으로 초대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 철학은 삶과 동떨어져 있는 학문이 아니거든. 단지 생각의 틀을 넓혀보려는 노력이지.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지만 철학이야말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생각의 기둥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도 네 엄마의 언어를 사용해서 철학을 다시 정의내려보았어. ‘철학은 일상 속에서 조금 더 멀리, 더 깊이, 더 넓게 생각해보는 힘이다.’라고.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격동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이고 유동적인 사회야. 그래서 자신만의 고정관념과 가치관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파도 위에 표류하지 말고 항해하려면 자기만의 네비게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지. 치열하게 고민하다 지치면 이런 저런 책들도 읽어보고 ‘아,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힘빼고 웃는 것은, 좋은 환기가 되겠지? 두 번째 기사에서는 인생에서 ‘행복한 철학자’가 되기 위한 밀도 높은 상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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