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한해였던 2023년, 자멸하는 인류를 구할 방법은?
2023년을 한 단어로 정리한다면 '전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올해 인류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참혹한 현장을 목도했다. 사망자 숫자는 매일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막을 별다른 조치는 없는 현실에서 인류 문명이 결국 자멸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왔다.
세계의 분쟁을 주로 다뤄왔던 구정은‧오애리 기자는 최근 펴낸 저서 <전쟁과 학살을 넘어>(인물과 사상사 펴냄)를 통해 인류가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1‧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왜 여전히 서로를 죽이고 있는지 그 배경과 이유를 분쟁 지역별로 자세히 분석했다.
2022년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3년 10월 벌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 전쟁, 여전히 혼란스러운 시리아 내전,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 2003년 미국의 침공 이후 혼란기를 겪은 이라크 전쟁까지 현대사에 있어서 주요 갈등 지역을 세세히 다뤘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전쟁을 막을 수는 없을까'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다. 2022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 소식을 접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의 전쟁을 중단시키는 것과 함께 어떻게 해야 추가적인 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1998년 채택된 로마규약과 2002년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이하 ICC)를 통해 반인도범죄에 대한 단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로마규약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공격'으로 살인 및 학살, 노예화, 강제추방, 강제이송, 투옥 및 고문, 성폭행, 강제임신, 강제 불임시술 등을 저지르는 것을 반인도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이 규약에 따라 2002년 헤이그에 ICC가 만들어졌다. 이 재판소에서는 국제인도법이나 무력 충돌에 관한 국제법과 관련한 여러 의정서들을 통해 분쟁 당사자들의 반인도 범죄 여부를 가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강대국들이 로마규약을 거부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은 로마규약에 서명했으나 이후 철회했고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은 처음부터 서명하지 않았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규약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ICC 재판에 회부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2014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비롯한 서안 지역 불법 정착촌 건설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요청에 따라 ICC가 이 사안을 조사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은 ICC의 조사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ICC 검사였던 파투 벤수다는 관할권 문제에 대한 판결을 요청했고, 이에 가자지구와 서안지구가 이스라엘에 점령된 동예루살렘에 대한 관할권이 있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미국은 벤수다의 비자를 취소하고 금융 제재까지 가하며 반발했고, 결국 ICC는 벤수다의 퇴임 이후 이 사안에 대한 조사를 중단했다. ICC의 조사 역시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된 셈이다.
올해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발생하자 스위스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공식적인 ICC 개입을 요청했다. ICC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모두 범죄를 행했다는 증거가 있다면서 기소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런데 실제 기소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강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강대국 정치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는 ICC가 실제 전쟁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드는 대목인데, 저자들은 ICC가 이번 전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앞으로 전쟁과 관련한 기준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스라엘을 상대로 칼을 빼들면서 ICC는 국제사회 앞에서 '정의'의 기준을 보여줘야 하는 위치에 섰다. 여러 문제가 있다 해도 반인도 범죄에 대한 단죄는 매우 중요하다. 개인이 개인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 국가 같은 거대한 단위의 행위자가 집단에게 저지른 짓을 처벌하는 것이며 일종의 역사적 평가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지나간 전쟁과 범죄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는 세계 혹은 한 사회의 이후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준거가 된다. 당장 한국만 해도 베트남전에서의 행위에 대한 논쟁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금기시 돼왔다. 파병과 국익, 전쟁의 금전적 이득과 윤리적 측면, 그리고 전쟁의 동기와 전쟁범죄 같은 것들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고 사회적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게 막는 최대 걸림돌이 베트남전이다.
과거와 직면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제대로' 대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사회 전체를 성숙하게 만든다는 것을 반인도 범죄 재판들은 보여주고 있다"
물론 당장 ICC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범죄에 대해 단죄를 내린다고 해서 이들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거나 전쟁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장치가 없고 유엔에서도 어떠한 조치를 할 수 없다면 국제사회의 '약육강식' 논리는 더욱 강화될 것이고 이는 인류 전체의 불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2024년 인류는 두 개의 전쟁을 안고 새해를 맞이하게 됐다.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반인도 범죄에 대한 아무런 평가가 없으면 2025년에는 대만과 한반도를 비롯해 기존의 전쟁 발생 위험 지역이 실제 전쟁을 하는 지역으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쟁의 예방과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중단하려는 노력과 함께 반성과 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는 강대국 정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매우 추상적이고 이상적일 수 있지만, 결국은 전 세계가 '인류애'라는 가치를 상기시키고 이를 지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진화를 통해 습득해 온 공감과 연민과 정의감이 있다. 그러나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앞서게 되면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이기주의와 폭력성이 판치게 된다. 하지만 개개인과 국가들 모두 통합체인 '인류'가 되면 보편적 인권과 평화라는 화두가 다시 고개를 들며 윤리적 판단이 '냉혹한 국제질서'의 일부이자 한계이자 규범으로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인류애'라는 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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