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무료예식' 신신예식장 대표 "가난한 예비부부를 위한 제야의 종 울릴 것"
백낙삼 전 대표 4월 별세 후 아들 운영
56년간 1만5,000쌍 무료 결혼식 올려
15만 원 내고 결혼식 올린 40대 부부
사별한 80대 할머니 드레스 입고 사진
백남문 대표, 31일 '제야의 종' 대표 참석
올여름 40대 기혼 여성 A씨가 경남 창원의 오래된 '신신예식장'을 찾았다. 경제적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결혼식을 못했던 A씨는 백남문(53) 신신예식장 대표에게 "남편과 결혼사진 한 장 찍고 싶다"고 부탁했다. 백 대표는 머리를 끄덕였다. A씨 부부는 여느 예비부부 못지않게 번듯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비용은 15만 원. 이 결혼식의 유일한 하객이었던 백 대표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에 왜 아버지가 50년이 넘도록 무료 결혼식을 해줬는지 알 것 같았다"며 카메라를 들었다.
1만5,000쌍 결혼식 올린 '신신예식장'
1967년 예식장을 열어 형편이 어려운 예비부부 1만5,000여 쌍에게 무료 결혼식을 올려줬던 백낙삼(1931~2023) 전 대표가 올해 4월 작고했다. 아들인 백남문 대표가 대를 이어 예식장을 운영하고 있다. 백 대표도 부친의 뜻을 이어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예비부부에게 무료로 식장과 정장, 웨딩드레스를 빌려준다. 결혼사진도 백 대표가 직접 찍어준다. 27일 창원에서 만난 백 대표는 "요즘에도 예비부부들의 문의가 끊이질 않고 있다"며 "시대가 좋아져도 경제 사정이 어려워 결혼식을 못 올리는 분들이 많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정이 딱한 예비부부들의 결혼식을 돕는 이들 부자(父子)의 공로에 서울시는 31일 열리는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 백 대표를 시민대표로 초청했다. 백 대표는 "그럴 자격이 되나 싶지만 가문의 영광으로 감사히 생각한다"며 "가난한 예비부부들을 위해 꼭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예식장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중앙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던 백 전 대표는 집안 사업이 망해 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뒀다. 이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홀로 남은 그는 길거리 사진사로 생계에 뛰어들었다. 백 전 대표는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다 돈이 없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한 부부로부터 결혼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백 전 대표가 사진을 찍어준다는 소문에 가난한 부부들이 몰렸다. 백 전 대표는 사진사를 하며 모은 자금으로 지금과 같은 자리에 신신예식장을 열어 무료 결혼식을 올려줬다. 백 대표는 "아버지도 결혼식을 바로 못 올리고 집에서 물 떠놓고 맞절하는 식으로 결혼을 하셔서 가난한 부부들과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예식은 소박하지만 다 갖췄다. 드레스와 예복은 미리 사두거나 기부받은 것을 사용하고, 헤어와 메이크업은 예식장에서 비용을 부담한다. 주례도 백 전 대표가 직접 했다. 최소한의 사진 촬영비만 받는다. 다만 부부들이 형편 닿는 대로 내면 그대로 받았다. 백 대표는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아 건물도 크게 짓고 손님도 많이 모시자고 말한 적이 있다"며 "아버지는 (그분들이) 돈이 어디 있냐며 더 받을 수 없다고 딱 잘라 얘기하셨다"고 전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은 백 대표도 무료 예식을 계속한다. 어렵고 힘들지만 감동과 보람이 있다. 결혼식을 못 올리고 한평생 산 80대 할머니가 남편과 사별 후 홀로 찾아와 사진을 찍고, 어려운 형편에 결혼식을 못 해 수십 년간 한이 맺혔던 부부도 예식장에 왔다. 백 대표는 "예식장을 찾아오는 많은 부부들이 저마다의 안타까운 사정이 있었다"며 "그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과거엔 돈 없어도 결혼했지만, 요즘엔 아예 결혼 포기"
1970~80년대 신신예식장을 찾는 이들은 20~30대의 젊은 부부들이 대부분이었다. 많게는 하루 10쌍씩 결혼식을 올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 달에 10~20쌍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결혼식 올릴 비용이 없어 뒤늦게 결혼식을 하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과 노년층이 대부분이다. 백 대표는 "과거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살기도 했지만, 요즘 세대들은 경제적 이유로 결혼 자체를 포기하는 것 같다"며 "결혼식 비용만 해도 수천만 원이 들고, 주거 비용도 너무 높아 젊은 세대들에게 결혼이 부담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혼인건수를 뜻하는 조혼인율은 1980년 10.6건이었으나 올해 10월 기준 3.7건으로 추락했다. 또 초혼 신혼부부 중 대출잔액이 있는 부부가 전체의 89%에 달했다. 대출잔액 중간값은 1억6,400여만 원이다. 10명 중 9명이 수억 원의 빚을 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는 얘기다.
백 대표는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결혼식을 못 하는 젊은이들은 저희 예식장을 찾아달라"며 "예식장이 오래돼 손님을 모시기도 죄송할 만큼 누추하지만, 호텔이나 화려한 예식장에서는 찾기 어려운 매우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결혼식을 열어드리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창원= 윤한슬 기자 1seu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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