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용이 돼 나라를 지킨 대왕암의 일출 [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푸른 용(龍)의 해다. 우리나라에는 용의 전설이 깃든 바위, 해안, 연못, 폭포 등 명소가 많다. 오랜 세월 도를 연마한 끝에 하늘로 오르는 상상의 동물로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궁궐에서는 임금의 상징이기도 하다. 청룡의 해에 첫 일출은 어디서 보는 것이 좋을까.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왕의 전설이 담긴 경북 경주 감포 해변을 찾았다.
● 문무대왕암의 일출
“내가 죽거들랑 동해 바다에 장사를 지내라. 나는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성한 왕이다. 김유신, 김춘추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문무왕은 최종적으로 이 땅에서 당나라 군대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해 통일신라를 완성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문무왕은 삼국통일 후에도 경계를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왜(일본)가 통일신라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존재라고 내다봤던 것.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대왕암에서 뿌려 달라고 유언하게 된다. 그는 결국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었다.
문무대왕암의 중앙에는 수면에서 깊이 1.2m의 십자형 수로가 있고, 그 중앙에는 거북이 모양처럼 보이는 커다란 돌이 놓여 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곳에서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문무왕은 죽은 후 아들인 신문왕에게 해룡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용은 대나무를 주면서 “이것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어라. 그러면 온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피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불린다. 1만 개의 파도(고난과 위기)를 가라앉히는 피리라는 뜻이다.
맑은 날씨의 해변에서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파도를 헤치고 올라오며 오메가 현상을 불러온다. 대왕암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장엄하다. 죽어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용이 떠오르는 듯하다. 대왕의 만파식적처럼 온갖 고난과 역경을 물리치고, 평화가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새롭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경주시는 1월 1일 문무대왕릉 일원에서 3000여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신년 해룡축제’를 열 예정이라고 한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경북 포항 구룡포 호미곶에서도 4년 만에 해맞이 축제가 열린다.
● 감은사지와 용굴
감포 앞바다에 연결된 대종천변에는 감은사지가 있다. 문무왕이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짓기 시작한 절이다. 감은사지에는 텅빈 대지에 두 개의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감은사지는 해질 녘 노을에 찾으면 좋다. 분홍빛으로 선연하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두 개의 3층 석탑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실루엣을 보여 준다. 육중한 화강암 덩어리가 단순하면서도 장중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이 탑은 우리나라 3층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문무왕이 해안으로 침투하는 왜구를 경계하기 위한 비보(裨補)적 의미로 세운 탑이라는 해설이다.
그러나 문무왕은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영면하게 됐다. 아들인 신문왕은 즉위 이듬해(682년)에 이 절을 완공시켜 ‘감은사(感恩寺)’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이로써 감은사는 왜구를 막는 비보 사찰이면서도, 문무왕의 추모 사찰이란 의미도 갖게 됐다. 문무대왕 수중릉과 감은사는 바다와 육지가 가까운 곳에 세트로 지어진 추모공원인 셈이다.
감은사지를 돌다보니 해가 완전히 지고 보름달이 떠올랐다. 감은사지 3층 석탑에는 자정까지 조명이 비추고 있어 한밤중에도 제법 운치가 있다. 두 개의 탑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니 말 그대로 ‘신라의 달밤’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감포 전촌항 해변에는 용굴로 알려진 해식동굴이 있다. 파도와 시간이 만들어낸 자연의 조각품인 용굴은 ‘사룡굴’과 ‘단용굴’ 두 곳이 있다. 사룡굴에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지키는 네 마리 용이 살았다고 하고, 단용굴에는 용이 한 마리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굴 안에서 동해 일출을 찍기 위한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파도 소리가 울려퍼지는 동굴 안에서 인생 샷을 건질 수도 있다.
● 용의 전설이 숨쉬는 곳
동해에서는 요즘도 자주 용오름이 관측된다. 해수면과 하늘의 구름이 일직선으로 연결돼 거대한 수증기 기둥이 형성되는 기상현상이다. 이런 용오름 현상을 보고, 사람들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동해안에는 용을 숭상하는 무속신앙이 발달했다. 계곡이나 강가의 절벽에도 수심이 깊은 연못에는 대부분 용소(龍沼), 용연(龍淵), 용담(龍潭)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이무기가 천년 동안 수행을 하다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함께 전해진다. 설악산 비룡폭포는 용이 하늘을 나는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사찰에 가면 대웅전 처마 단청에 용이 새겨져 있는 곳이 많다. 물에 사는 용이 화재를 예방해줄 것이라는 속설 때문이다. 또한 사찰에 있는 비석은 이수(螭首)와 비신(碑身), 귀부(龜趺) 등 3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수는 이무기 모양의 머릿돌이고, 귀부는 비신(몸통)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 모양의 돌이다. 그런데 귀부는 몸통은 거북인데 얼굴은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힘이 세기로 유명한 용의 6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사찰에서 계단이나 지붕 등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용머리 장식품은 대부분 이무기다. 이무기는 용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하는 수행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지명 중에도 용두동(용의 머리 모양 지형에 있는 동네), 용강동(용처럼 생긴 강), 용산(용처럼 생긴 산), 용문(용이 바위를 열고 승천했다는 문) 등 전국에 용과 관련된 명소가 많다. 제주공항 인근에 있는 용두암은 10m에 이르는 괴암이 옆에서 보면 용의 머리처럼 보인다. 용이 입에 여의주를 문 듯이 해가 걸리는 일출 장면을 찍을 수도 있는 곳이다. 용두암은 바람이 잔잔한 날보다는 파도가 심하게 몰아치는 날에 봐야 제맛이다. 천지개벽하는 분위기 속에서 용이 ‘으르르’ 울부짖으며 바다 위로 솟구쳐 오르는 모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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