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리지] 1456년(세조 2) 음력(이하 음력) 6월 2일, 성삼문, 박팽년 등이 세조를 시해한뒤 단종을 복위시켜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된다. 연루자 70여명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단종복위사건이다. 고문도중 죽은 박팽년, 자살한 유성원을 제외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김문기, 성승, 박쟁, 권자신 등 주모자들은 군기감(軍器監·1466년 군기시로 개칭) 앞 길에서 거열형에 처해졌다. 거열형(車裂刑·능지처사, 능지처참)은 수레, 우마에 사지를 묶어 몸을 조각내 죽이는 최고 극형이다. 세조는 백관을 모아 빙 둘러서게 한 다음, 거열 장면을 지켜보게 했으며 사흘간 머리를 저자에 효수(梟首·또는 효시)했다. 군기시는 서울시청·한국프레스센터에 있던 병기제작 관청이다.
조선중기 천재시인 허균(1569~1618)은 민중봉기를 선동하는 ‘남대문괴서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참수형을 당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24일 실록은 “서쪽 저잣거리에서 모든 벼슬아치가 지켜보는 가운데 허균의 형이 집행됐고 머리는 효시됐다”고 기술한다. 그의 가족도 죽거나 귀양 갔으며 재산이 몰수되고 집은 헐려 못이 됐다. 그러나 허균은 죄가 없었고 당대에도 논란이 제기됐다.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의 모함에 의해 살해됐던 것이다. 그가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던 서쪽 저잣거리는 서소문(소의문) 밖 네거리이다. 서소문 밖 사형장은 오늘날 중구 중림동, 순화동 일대이다.
처형장은 뜻밖에 큰길과 대형시장 옆에 설치
세조 입장에서야 사육신이 대역죄인이기는 하지만 경복궁 가까이의 도성 한복판 대로에서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그것도 공포스럽고 끔직한 방식으로 처형한 사실이 놀랍다.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후 급속한 민심이반에 직면한 세조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된다. 같은 모반혐의의 허균은 도성 바로 밖 시장에서 처형됐다. 흔히 사형장이라면 인적이 드문 곳에 둬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조선시대는 달랐다. 한양의 사형장은 이들 지역외 또 어디에 있었을까?
<고종실록> 1872년 4월 30일 기록은 “본래 사형은 서소문 밖에서만 거행했지만, 급히 처형해야 할 죄인은 무교(武橋·군기시 앞 다리)에서 집행했다”고 밝힌다. 공식 처형장은 서소문 밖이었지만 시급을 다투는 중대범죄자는 도성 안에서 죽였다는 것이다.
전근대사회의 형벌제도는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나라에서 일벌백계의 원칙하에 엄벌주의를 지향했다. 조선도 잔인하고 엽기적인 처벌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줘 범죄를 예방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사형은 사사(賜死·사약형), 교형(교수형), 참수형, 능지처참(머리와 손·발을 자르는 형) 등 4등급으로 구분된다. 신체를 보존할 수 있는 사사와 교형은 왕족과 고관을 대상으로 선고되는 우대형이었다.
이에 반해 신체훼손을 금기시했던 조선에서 몸과 머리를 분리시키는 참형 이상은 훨씬 무거운 형벌로 간주됐다. 극형을 받았던 국사범 등 중범죄는 공개형을 원칙으로 했다. 거열된 뒤 절단한 머리는 효수(梟首) 또는 효시라 해 대개 사흘간 거리에 매달아 뒀으며 또한 잘라낸 팔과 다리는 팔도의 각 지역에 돌려서 보도록 했다. 전시된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는 1년여가 걸렸고 신체 전부를 되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인구 늘며 강력범죄 등 도시문제 야기···야만적 처벌로 대중에 경종
범법자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국왕의 존엄과 국법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사실, 조선시대 한성은 도시화와 유민의 유입 등으로 범죄발생률이 지방에 비해 훨씬 높았다. 조선후기 강력범죄 판례집인 <심리록(審理錄)>에는 정조가 재위기간 판결한 1112건의 중범죄 사건이 실려있다. 이에 의하면, 한성부에서 발생한 범죄건수는 조선 전체 범죄의 14.5%에 달했다. 한성의 당시 인구가 18만9000여명으로 전체의 2.6%에 불과한 것과 비교할때 한성의 범죄율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한성부 내 5부에서는 신흥 상공업 지역이었던 서부(용산·마포)에서 가장 많은 69건의 범죄가 일어났다. 폭증하는 범죄해결을 위해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목적에 따라 공개처형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시장(저자)이나 그주변지역에서 거행됐다. <코리아 리뷰> 1903년 12월 호는 “1894년 이전에 있었던 서울의 사형장으로 경복궁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 아주 오래된 다리인 금천교(禁川橋), 종로의 서쪽이자 대로의 첫번째 다리인 혜정교(惠政橋), 무교(武橋), 서소문 밖, 한강변의 새남터 등 5곳”을 꼽았다. <코리아 리뷰>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일본의 조선침략을 폭로할 목적으로 1901년부터 1906년까지 발간한 영문 월간잡지이다.
금천교는 금청교(禁淸橋) 또는 금교(禁橋)라고도 했다. 종로구 체부동 일대 청계천의 지류인 백운동천에 있었던 다리로 5군영의 하나인 금위영(禁衛營·대궐과 도성수비 군대)이 한때 이 다리 앞에 있어 사형터로 활용됐던 것이다. 혜정교(惠政橋)는 광화문 북쪽에서 흘러내린 중학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지점의 다리로 그 옆에 우포도청(광화문우체국)이 자리했다. 포도청은 한양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기관으로, 좌포도청, 우포도청 등 두개의 청사가 있었다.
육의전 등 관허시장 밀집한 도성 안에서 대역죄인 처형
무교(武橋)는 정동과 서소문동쪽에서 흘러내리던 정릉동천에 놓인 다리였다. 군기시 동쪽에 있어 군기시교, 군기교라고도 했다. 1920년대에 정릉천교가 복개되면서 없어졌다. 무교 뿐만 아니라 군기시 대로에서도 사형이 거행됐다. 철물전이 밀집했던 철물교(鐵物橋·보신각), 좌포도청(단성사) 파자교(把子橋)에서도 처형장으로 쓰였다. 1504년(연산군 10) 무오사화때 김굉필(1454~1504)의 머리가 철물교에 효수됐다.
이들 처형장은 경복궁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종로의 육의전을 비롯한 관허시장이 산재한 곳이기도 했다. 도성 안에서는 주로 군율을 적용한 국사범 처형이 이뤄졌다.
도성 밖의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 건국이래 정부가 지정한 공식 사형장으로 운영됐다. 서쪽은 숙살(肅殺·사물을 죽이는 성질)의 방위로, 형벌도 서쪽에서 행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더욱이 서소문 밖은 성저십리(도성에서 4㎞지역) 내 가장 번화한 지역이기도 했다.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마포·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돼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다. 이에따라 서소문 밖 네거리는 17세기 후반~18세기 칠패시장과 서소문 시장이 번성했다. 백성들에게 경종을 울리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던 것이다. 서소문역사공원 옆에 있던 이교(흙다리) 남쪽 백사장이 형장이었다고 전한다.
정부 공식 사형장은 서소문 밖 네거리···머리전시 일상사
이곳에서의 처형은 일상사였고 백성들도 무감각했다. 영국의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은 서소문 네거리를 지나다가 동학군의 잘린 머리를 목격했다. 그녀는 <조선과 그 이웃들>에서 “그들의 머리는 세 발의 장대에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장대가 쓰러져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머리가 버려지자 개가 뜯어먹었고 그 옆에서 어린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놀았다”고 했다.
용산의 큰 길가의 당고개(용산구 신계동)도 공식 사형장으로 애용됐다. 경종의 편에 섰던 김일경(1662~1724)과 목호룡(1684~1724)이 영조 즉위직후 이곳에서 목이 잘렸다. 당고개는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당시 천주교신자들이 순교한 장소이기도 하다. 천주교에서 1986년 순교기념비를 세웠고 주변은 신계역사공원으로 단장됐다.
조선후기 이후 사회가 안정화되고 경제가 발달하면서 조선초기 10만명이었던 서울인구가 18세기 후반 30만명까지 늘어난다. 서소문 밖과 당고개 일대에도 민가가 조밀하게 들어서며 사형장이 기피시설이 됐다. 결국 사형장은 한강 백사장(새남터, 절두산)으로 밀려난다.
용산구 이촌동의 새남터는 훈련도감(조선후기 한성부 수비를 맡던 군대)과 어영청(왕의 호위 군대)의 교장(훈련장)이 위치했다. 도성의 서쪽 방위이고 또한 경강 유통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한 용산장에도 접해 군율 적용 처형터로 맹위를 떨쳤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1752~1801) 신부가 처형당한 뒤로 많은 천주교신자들의 순교지가 됐다. 김대건 신부도 1846년(헌종 12) 7월 25일 새남터에서 효수됐다. 1950년 천주교회가 순교기념지로 지정했다.
도성 안팎 처형장, 민가 밀집하자 한강 백사장으로 밀려나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은 총융청(경기 방어 군대) 교장이었다. 잠두봉(누에 머리 모양의 봉우리) 바로 아래 양화진 나루터는 한강을 통해 각 지방에서 조세곡 수송선과 어물, 채소 등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 잠두봉은 경치가 좋아 한강의 명승 중 하나였지만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의 집단처형이 벌어진 후 머리 자르는 산이라는 뜻인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렸다. 1956년 순교성지로 성역화했고 1967년 순교성지 기념성당과 박물관을 건립했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1851~1894)도 양화진 강변 백사장에서 능지처참돼 전시됐다. 당시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조선 정부에 이의 중단을 요구했지만 시신은 16일간 효수된 채 방치됐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심정을 비장하게 읊은 걸작 시가 있다. “북소리 울려 목숨을 재촉하고(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고개 돌리니 해가 저무는구나(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황천 길에는 주막도 없다는데(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을 것인가(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심금을 울리는 이 시는 대표적 절명시(絶命詩)로 요즘도 자주 언급된다. 그동안 사육신 성삼문(1418~1456)의 유작으로 알려져 왔지만 아쉽게도 작자는 중국인이다. 생육신인 남효온의 <육신전>에 누군가 이 시를 소개하면서 성삼문의 시라고 주석을 단게 오해의 시작이었다. 그러자 어숙권이 <패관잡기>에서 양억(梁億)의 <금헌휘언(今獻彙言)>을 인용하며 “명나라의 손궤(孫蕢)라는 인물이 남옥(藍玉)의 옥사 때 형장으로 끌려 가면서 쓴 시”라고 판명했고, <순암집>, <육선생유고> 등 후대 여러 책들도 동일한 사실을 밝혀냈다.
갑오개혁 이후 능지처참 폐지···그러나 고통스런 집행은 지속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야만적인 능지처참 형벌은 역사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렇지만 사형수들은 여전히 참형 이상의 고통을 받았다. 1904년 스웨덴 여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쓴 <나, 코리아>는 “관군 20여명을 살해한 산적의 교수형은 굵은 막대기로 안다리 뼈, 팔 뼈, 갈비 뼈를 차례로 부러뜨린뒤 고통스럽게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전했다. 제도가 바뀌어도 관념과 의식은 더디게 변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