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에서 탕수육 빙빙 돌아가는 식탁…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sobnet@mk.co.kr) 2023. 12. 30. 11:03
[그거사전 - 8] 중화요리 식당에 돌아가는 식탁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명사. 명사. 1. 레이지 수잔(Lazy Susan), 찬쭈어주안판(餐桌轉盤) 2. [옛말] 덤웨이터(dumbwaiter)【예문】뒤늦게 레이지 수잔을 돌려봤지만 남은 건 탕수육 접시의 당근뿐이었다.
레이지 수잔이다. 고급 중식당에 가보면 테이블 중앙에 원형으로 된 돌림판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먼 곳에 놓인 요리를 먹고 싶다면 회전판을 돌리면 그만이다. 손을 뻗거나 접시를 옮기지 않고도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 앉아 여러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다. 중국어로는 찬쭈어주안판(餐桌轉盤)이라고 하는 이 회전판의 이름은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들다. 중식당을 대표하는 물건에 서양식 이름, 그것도 ‘게으른 수잔’이라니 말이다.
지금의 중식당 친화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레이지 수잔은 1950년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제품이었다. 레이지 수잔이란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그리고 또 수잔은 누구인지 확인된 바는 없다. 일단 단어 자체는 웹스터 영어사전에 1933년 등재됐다. 일반적으로는 1917년 베니티 페어에 실린 광고가 최초로 알려져 있다. 이 광고에서는 마호가니로 만든 Ovington사(社)의 레이지 수잔을 8.5달러에 판매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광고 문구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하인, 똑똑한 여종업원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싼 임금으로 고용하세요”였다. 하지만 몇몇 기사는 레이지 수잔이 1917년 훨씬 이전부터 1903년 보스턴저널 등 각종 문헌을 통해 언급되고 있다며 반박하기도 한다.
어원을 좇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8세기 영국의 ‘벙어리(조용한) 종업원’이 등장한다. (dumb은 벙어리가 아닌 농인이나 언어장애인으로 순화해야 마땅한 용어이나 당대 시대상을 고려한 번역이니 너른 양해 부탁드린다) 레이지 수잔의 옛 이름인 덤웨이터(Dumbwaiter)는 바퀴가 달린 여러 층으로 된 쟁반 혹은 회전하는 상판이 있는 작은 테이블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일부 문헌에서는 덤웨이터를 두고 ‘하인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주방 도구’를 포괄하는 단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비슷하지도 않은 온갖 물건에 덤웨이터, 레이지 수잔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다.
이후 파리에서 유행하던 덤웨이터를 미국에 들여온 것은 의외의 인물이다. 바로 토머스 제퍼슨 제3대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저녁 식사 시간 동안 종업원이나 하인의 서빙으로 인해 대화가 끊기는 걸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칸 마다 코스별 식사가 담긴 덤웨이터를 이용했다. 제퍼슨의 딸인 수잔이 ‘자신의 식사는 항상 맨 마지막이나 돼서야 나온다’고 불평한 일 때문에 덤웨이터를 발명했다는 설도 있지만, 제퍼슨의 자녀 중에 수잔은 없기에 낭설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저택 몬티첼로에 자신이 발명하거나 영감을 얻은 장치들을 여럿 설치해뒀는데 덤웨이터도 그중 하나였다. 개중에는 회전문에 음식 접시 등을 올려둘 수 있는 선반을 설치해둔 장치도 있었다. 그는 대통령 당선 이후 백악관에도 해당 장치를 설치하고 덤웨이터를 놔뒀다.
시사만화가 스튜어트 맥밀렌은 자신의 만화 [덤웨이터가 은폐하고 있는 것]을 통해 발명가 대통령 제퍼슨의 이중성에 대해 흥미롭고 날카로운 통찰을 내놓기도 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개국 공신이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강조한 인물이었으며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본인 역시 흑인 노예들을 여럿 부려온 대농장주였다는 점에서 ‘내로남불’ 격 모순적인 행태라는 비판을 받는다. 맥밀렌은 덤웨이터 역시 ‘식사 자리의 프라이버시’라는 명분 이면에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신이 저택에서 노예를 부리는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은폐하기 위한 방식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맥밀렌은 그 논의를 확장해 현대를 사는 우리 역시 제3세계의 고강도 노동과 빈곤한 무분별한 자원 채취 등 글로벌 공급망 속 희생을 마치 덤웨이터에 가려진 노예의 존재처럼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은폐하고 외면하는 데에 동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후 정확히 알 수 없는 과정을 거쳐 덤웨이터는 게으른 수잔으로 개명한다. 수다스러운 시종을 ‘덤웨이터’가 대신한 것처럼, 회전 테이블 덕분에 더 이상 식사 시중을 들 필요가 없어진, 그래서 게을러진 하녀 수잔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둘 다 지금에 와서는 다소 계급 차별적인 용어이지만 발상이나 작명 센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에 활발히 활동한 여성 인권 운동가 수잔 B. 앤서니(1820~1906)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바 없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레이지 수잔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그가 1877년 턴테이블의 전신 격인 축음기(포노그래프)를 발명한 것이 이후 레이지 수잔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축음기와 레이지 수잔의 공통점은 뭔가 돌아간다는 것밖에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오히려 수잔은 하녀, 가정부의 흔한 이름 중 하나였고, 냉소적인 유머로 쓰이다 자리 잡았다는 설이 재미는 없지만 가장 그럴듯하다. 그저 잘 어울리는 두 단어를 제품명에 쓴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역시나 재미는 없지만 그럴듯하다.
그럴듯한 설(說)들을 걷어내고 검증된 자료만 찾으면 1891년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엘리자베스 하웰이라는 여성은 ‘셀프 웨이팅 테이블’이라는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는데, 이 디자인은 이후 1900년대 초 생산된 레이지 수잔 제품들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생각보다 연식이 오래된 레이지 수잔은 1900년대 초기 무렵에는 이미 ‘구닥다리’ 취급받았다. 하지만 195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간장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해당 지역 차이나타운 중국 음식점을 여러 개 운영하기도 했던 중국계 미국인 조지 홀이 자신과 동업자들의 식당에 본인이 디자인한 레이지 수잔을 다시 도입하며 부흥을 이끈다. 재미있게도 미국에서 지금 레이지 수잔 하면 떠오르는 ‘중화요리집 식탁 위의 그거’를 정립한 셈. 이후 중국 음식점이 존재하는 국가(=사실상 모든 국가를 의미한다)와 중국 본토에도 레이지 수잔이 보급됐다. 당시 냉전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어떤 편리함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
레이지 수잔에게 이름을 뺏긴 덤웨이터는 어떻게 됐을까.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 조리된 음식을 다른 층으로 빠르게 서빙하는 요리 운반용 승강기의 이름이 바로 ‘덤웨이터’다.
- 다음 편 예고 : 논밭 한 가운데 있는 하얗고 둥근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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