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은 불안인 동시에 거대한 포용이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타자가 없는 곳에서 자아의 성립은 불가능
무인도에 표류한 이는 자체가 무인도이다
어제를 먹은 오늘과 다가오는 미래의 순환
화면 위에 둥근 시간의 흔적들이 서성인다
빛이 세상의 기억이면 어두움은 망각이다
어둠은 생명의 시작점이며 종착점이 된다
물과 수증기, 안개 사이로 부서지는 결정들. 방수연(39)의 시야에는 그런 것들이 맺혀 있다. 풍경은 망막과 피부에 반쯤 흡수되고, 또 반쯤 스러진다. 인식의 주변을 스쳐 가는 것들 가운데 건져 올린 진실마저 순간마다 잊힌다. 들숨과 날숨 사이 지금이 휘발하고, 현재는 곧 과거에 은둔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사실 저마다의 얕은 기억 속에서만 산다.
방수연은 “어두움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어두움이란 빛의 부재일까, 아니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존재일까. 또렷하게 빛나는 낮의 색채는 밤의 시간 동안 사라지는 것일까, 또는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일까. 회화의 과정 속에서 이러한 질문들은 보다 실제적인 문제가 된다. 어두움을 재현하는 물감의 물성이 만져지는 감각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을 밀어내는 시간의 무게가 붓의 움직임에 가중을 더한다. 처음의 바라봄 이후 변모하는 마음의 생김새를 겹겹이 품은 화면은, 그러므로 무겁도록 적막하다.
밤의 어둠은 세상의 이미지를 분절시킨다. 형상은 윤곽으로 탈바꿈하고, 전체의 시각보다 부분의 촉각이 우선 드러난다. 짙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오래 적응해야 한다. 작가는 교외 레지던시에 머물며 마주한 밤이 상대적으로 기다란 어둠이었다고 고백한다. 도시보다 한층 더 고요한 한밤중의 세상은 스스로의 감각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떠오른 밤’(2021)은 그러한 밤을 그린 회화다. 수많은 밤중에서도 유독 깜깜한 밤이었다. 얼마나 어두웠던지 실제 풍경 속에 나무가 서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시야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순간 어둠을 헤치고 나온 커다란 나무의 형상이 너무나 놀라웠다고, 그리고 한편 두려웠다고 한다. 화면 가득 어두움이 열매처럼 피어난다.
다시 한번 무인도를 떠올려 보자. 그리고 그곳의 밤을 상상해 보자. 고립된 어둠 속에서 섬과 섬의 모든 의식은 하나가 된다. 그래서,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우주가 된다. 기존의 자아를 지우고 공동의 의식으로서 새롭게 순환하는 세계다. 밤바다에 뜬 무인의 섬처럼, 어둠이 내려앉은 방수연의 화면은 장면의 층위를 분열하는 한편 통합시킨다. 나와 대상, 진실과 환상, 경험과 신화가 회화의 방식으로 뒤섞인다. 시간은 분절적으로 흐르고 기억은 선택적으로 수집된다. 이야기의 기원과 종말이 함께 자라나는 가운데 신비를 좇는 무언의 호기심이 까맣게 드리운다.
무인도를 무인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섬의 내적 환경과 큰 연관이 없다. 그러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바깥의 바다, 섬을 세상으로부터 단절하는 동시에 연결 짓는 매개다. 개입하지 않는 바다, 그러나 늘 그곳에 일렁이는 바다를 상상한다. 방수연의 화면 속 수면에 그러한 바다를 잠시 투영해 보아도 될까.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시간의 진동이며 운명의 그림자일 것이다. 순리를 약속하는 물의 떨림이 의식의 둥근 가장자리를 끊임없이 두드린다. 작가는 자신의 섬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것일까, 또는 그대로 머물고 싶은 것일까. 섬의 의식은 바다에 동화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더 멀리 확장되는 것일까. 무엇을 원하든 발목이 잠길 정도의 깊이까지 디뎠다면 판단해야 한다. 나아가 헤엄칠 수 있는 종류의 물결인지, 또는 이로써 충분한 모험이었는지.
작가 방수연은 건국대학교 현대미술학과에서 수학했다. 세움아트스페이스(2017), 갤러리 도올(2018), 오!재미동 갤러리(2019), 이유진갤러리(2020),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2021),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22), 갤러리 루안앤코(2023)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24년 8월, 갤러리 루안앤코에서 또 다른 개인전을 선보이기 위해 준비 중이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처럼 결혼·출산 NO”…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서 주목받는 ‘4B 운동’
- “그만하십시오, 딸과 3살 차이밖에 안납니다”…공군서 또 성폭력 의혹
- “효림아, 집 줄테니까 힘들면 이혼해”…김수미 며느리 사랑 ‘먹먹’
- “내 성별은 이제 여자” 女 탈의실도 맘대로 이용… 괜찮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단독] “초등생들도 이용하는 女탈의실, 성인男들 버젓이”… 난리난 용산초 수영장
- ‘女스태프 성폭행’ 강지환, 항소심 판결 뒤집혔다…“前소속사에 35억 지급하라”
- “송지은이 간병인이냐”…박위 동생 “형수가 ○○해줬다” 축사에 갑론을박
- “홍기야, 제발 가만 있어”…성매매 의혹 최민환 옹호에 팬들 ‘원성’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