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장태완처럼…산티아고에는 아옌데가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
냉전기 사회주의자 칠레 대통령
미국이 움직인 군부에 제거돼
영화·다큐로 알려진 ‘정의의 역사’
12·12도 ‘장태완·김오랑 드라마’로
이게 다 ‘서울의 봄’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 말이다. 일단 쿠데타 이야기부터 해보자. 나는 한국의 쿠데타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다. 전두환과 친구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1979년 나는 세살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나이다. 다만 나는 전두환을 기억하는 나이다.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기억하는 나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초등학교 교실에는 전두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순자 사진도 같이 걸려 있었다. 두 양반은 요즘 급훈이 걸려 있을 칠판 위에서 종일 초등학생들을 내려봤다. 매일 같은 사람 사진을 보다 보면 우상화의 늪에 걸려들게 된다. 선생들이 솜털 같은 초등학생들을 빗자루로 때리던 시절이었다. 선생들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신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매일 얼굴을 쳐다보니 위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학교 도서관에는 아동용 전두환 전기도 있었다. 그걸 읽은 기억은 없다. 표지는 기억이 난다. 나는 전기보다는 에스에프(SF)나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지 않고 유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교과서는 피해 갈 수 없었다. 교과서에 따르면 전두환은 국가의 위기를 해결한 위인이자 한국 경제의 아버지였다.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알 도리밖에 없었다. 5·16이 ‘군사혁명’이던 시절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근처 대학교에서 매번 최루탄 냄새가 흘러나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선생들은 수돗가에서 눈과 입을 씻고 어서 집에 가라고 종용했다. 선생들은 공부하라고 대학 보내놨더니 데모질이나 한다며 불평했다. 그걸 한쪽 귀로 들은 나는 대학 가면 데모질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세계란 순결하다.
학자 출신 대통령이 기관총을 들었다
1990년대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정신적 모피어스(‘매트릭스’ 캐릭터)를 한명 만난다.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내밀며 둘 중 무엇을 먹을 것인가 종용하는, 어딘가 좀 음험하지만 밥 잘 사주는 선배 말이다. 파란 약을 먹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된다.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한 세계를 볼 수 있다. 나는 파란색이 어울리는 쿨톤이지만 빨간 약을 먹었다. 그 시절 대학생이 된 사람들은 교육과 언론을 통해 파란 약만 공급받아온 정치적 병아리들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기니 주는 대로 먹고 먹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빨간 약을 삼킨 친구들의 세상은 순식간에 바뀐다. 매일 교실을 내려다보던 대머리 양반이 시민을 학살한 악당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정치적 우상이 생기게 마련이다. 권력의 편이 아니라 시민의 편에 섰던 누군가가 역사책에 나오는 위인을 대체하게 된다. 나에게 그건 재미있게도 한국 사람이 아니라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였다.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인물에 감응하게 된 건 영화 덕분이었다. 당시 나는 당대의 대학생들이 하던 모든 대학생스러운 짓들을 다 했다. 학교 앞 사회과학 전문 서점에서 무슨 무슨 ‘혁명사’를 잔뜩 구입해서 밤새 읽어나갔다. 교과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가 거기에 있었다. 영화 동아리에 가입한 덕에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정치적 영화들도 봤다.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피노체트가 독재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1975)와 다큐멘터리 ‘칠레 전투’(1979)는 심금을 울렸다.(두 영화는 지금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금을 울린 이유는 격정적인 드라마 때문이었다. 뿔테 안경을 쓴 학자 출신 작고 통통한 대통령이 기관총을 들고 군부가 장악하려는 대통령궁을 지키다가 결국 자결했다는 이야기에는 드라마가 있었다. 현실에서는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드라마 말이다. 항상 그렇다. 개인에게 역사는 가장 드라마틱한 순서대로 기억된다. 지나칠 정도로 쉽게 정권을 탈환한(것처럼 나에게 여겨졌던) 12·12 쿠데타와 칠레 쿠데타는 드라마성에 있어서 차원이 달랐다. 당시 나에게 그랬다는 이야기다.
시대를 앞서갔던 불평등 해소 정책
아옌데는 1908년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명문가 자제로 태어났다. 산티아고 의대에 들어간 그는 칠레 시민들이 겪고 있는 불합리와 불평등에 눈을 떴고 사회주의 서적들을 읽으며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1933년 사회주의 정당인 칠레사회당 창당에 참여한 그는 1937년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칠레사회당은 ‘소련의 조종을 받지 않는 사회주의’를 내세운 정당이었다. 칠레의 진보 좌파는 분열 중이었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도무지 서로 손을 잡는 일이 잘 없었다. 정권을 잡으려면 통합이 필요했다. 아옌데는 의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보수 정당인 기독민주당과의 연대를 지속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 대선이 찾아왔다. 칠레사회당과 공산당은 손을 잡고 ‘인민연합’을 결성했다. 아옌데는 대선 후보가 됐다. 통합을 위해 가장 적절한 인물을 선택한 것이다.
아옌데가 대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은 당황했다. 1970년대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쿠바가 소련을 끌어들여 중거리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며 시작된 그 유명한 쿠바 핵 위기가 일어난 것이 1962년이었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혁명에 가담했다 죽은 것이 1967년이었다. 많은 남미 국가에서는 이념 갈등으로 인한 내란과 쿠데타가 계속 이어지던 상황이다. 미국으로서는 가장 친미적인 칠레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걸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 기업들이 소유한 구리 광산과 대형 은행을 국유화했다. 부유층 토지 소유를 규제하는 개혁도 시작했다. 1971년 지방선거에서도 칠레 국민은 아옌데 정권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 시절 아옌데가 추진한 제도 중에서는 남녀 동일임금제, 전국민 생활임금제, 어린이 무상 아침 식사 등이 있다.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 나간 사람이다.
미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칠레 주요 수출품인 구리 가격을 폭락시키고 경제 제재를 가하는 방식으로 아옌데 정권을 침몰시키고자 했다. 당선 2년 만에 물가가 5배 이상 상승하면서 아옌데의 입지는 좁아졌다. 그럼에도 민주적 방식으로 건설한 민주주의 국가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 살바도르에 비가 내렸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쿠데타를 감행했다. 군대가 몰려온다는 소리를 들은 아옌데는 가족과 관료들을 대통령궁 밖으로 내보낸 뒤 마지막 항전을 준비했다. 탱크를 향해 대전차포를 쏘며 항전했다. 군부의 승리를 예감한 그는 결국 칼라시니코프 소총으로 자결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마지막 라디오 대국민 연설을 한 날이었다. 피노체트는 천수를 누리다 2006년 91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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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노태우 드라마’의 종말
‘서울의 봄’ 흥행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12·12 쿠데타는 오랫동안 명확한 주인공이 없는 역사였다. 어떠한 드라마도 없이 일군의 군인들이 너무나도 쉽게 한 국가의 권력을 탈취한 행위였다. 장태완 소장과 김오랑 소령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울의 봄’은 현대사에서 누구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던 이야기를 그 시대를 겪지 못한 세대에게 전하는 기막힌 프로파간다다. 아니다. 나는 프로파간다라는 단어를 나쁜 방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훌륭한 기능 중 하나가 프로파간다다. 12·12 쿠데타는 마침내 극적인 영웅을 얻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드라마는 이제 장태완과 김오랑의 드라마가 됐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에서 묘사된 아옌데의 극적인 드라마를 보며 칠레의 현대사를 공부했던 나처럼, 지금의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극적인 드라마를 보며 한국 현대사를 새로운 시점에서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더 바라는 것은 현대사의 악에 속해 있던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는 ‘재키’(2016), ‘스펜서’(2021) 같은 전기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칠레 감독 파블로 라라인의 ‘공작’(2023)이 올라왔다. 흡혈귀가 된 독재자 피노체트가 죽지 못해서 벌이는 소동을 그린 영화다. 압도적 독재자를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꽤 웃기는 내면을 가진 인물로 풍자한 블랙코미디다. 나는 얼마 전 여성 영화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아이템을 하나 제안했다. 점점 타락해가는 독재자 남편을 둔, 그러나 ‘청와대의 야당’이라는 별명도 있었던 여성의 삶을 블랙코미디로 만들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누가 봐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보고 싶다. 제목은 ‘청와대에 비가 내린다’다. 관심 있는 영화인 여러분의 호응을 부탁드린다.
문화 평론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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