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큰’ 보고 간 알바니아에서 만난 푸른색 ‘아날로그 환대’ [ESC]

한겨레 2023. 12. 3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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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걷다 보면 알바니아
영화 속 악당 소굴로 묘사된 나라
숙소선 지도 짚어주며 관광 안내
독재 역사 전시…기억하려는 노력
‘블루 아이’ 물감 뿌린 듯한 절경
공산주의 시절에 건설된 알바니아의 산간 마을 발보나. 김남희 제공

비옷도 없이, 스틱도 없이, 온몸으로 달려드는 비바람을 맞으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안경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에 시야가 희미해진 건 이미 한참 전. 벌써 세 시간째 오르막을 오르는 중인데, 한 명의 등산객도 만나지 못했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득한 이 산에 설마 나 혼자인 걸까. 길은 맞는 거겠지. 맞아야만 해. 나무둥치를 붙잡고 빗물에 철벅거리는 무거운 발을 끌어올렸다. 내가 여기서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떠오르는 말. “I will look for you. I will find you and I will kill you!.”(너를 쫓을 것이다. 꼭 찾아내서 죽여버릴 것이다.)

스컨데르베우 광장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알바니아 사람들. 김남희 제공

영화 ‘테이큰’과 달리 친절한 곳

루마니아 산책단원들을 공항에서 배웅한 후, 나는 혼자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로 날아갔다. 왜 알바니아냐고 묻는다면, 오래된 영화 덕분이다. 납치된 딸을 구하려는 리엄 니슨(찾아서 죽여버릴 거라는 저 유명한 대사의 주인공)의 액션 덕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 ‘테이큰’(2008). 막 연애를 시작했던 남친과 함께 그 영화를 봤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알바니아인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개선의 여지도 없고, 자비를 베풀 이유도 없는, 잔악무도한 범죄자들의 집단이었다. 사소한 일에 정의감이 쉽게 타오르는 나답게 불길이 확 붙었다. 이 영화는 나쁜 영화라고, 알바니아라는 나라와 사람들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고 열렬히 성토하다가 격렬히 싸웠다. 영화의 스펙트럼이 넓었던 그는 오락 영화는 그냥 오락으로 볼 수 없느냐고 하소연했지만, 분노의 질주는 계속되었다. 그 무렵에도, 지금에도 나는 영화 같은 매체일수록 사람들에게 편견을 심어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의 설정을 사소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사소함이 혐오와 증오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기에. 여행을 다닐수록 종교와 국적, 인종과 성별 같은 수많은 틀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튼 연애 초기에 심하게 싸웠던 터라 알바니아라는 나라는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언젠가 내가 직접 가서 알바니아의 매력을 찾아봐야겠다는 욕망과 함께. 문제는 공부는커녕 아무런 준비도 못 한 채 티라나로 날아갔다는 점. 지식도, 사전 정보도 없는 내 머리는 백지에 가까웠다. 그 점이 부끄러우면서도 알바니아가 그 백지를 어떤 색으로 물들일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 스컨데르베우(스칸데르베그)의 이름을 딴 광장 근처에 방을 얻었다. 광장에는 15세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알바니아를 수호했던 스컨데르베우 장군의 거대한 동상과 함께 모스크가 서 있었다. 5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기에 알바니아의 무슬림 인구는 절반이 넘는다고 했다. 모스크 옆에서는 트럼펫과 탬버린, 북을 든 남자 셋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서툰 연주였지만 흥을 돋우기에는 충분했다. 티라나의 시민들은 이방인에게 친절했다. 숙소에서는 아침 먹는 자리에서 세심하게 아날로그식 친절을 시전했다. 종이 지도를 가져와 이 도시에서 가볼 만한 곳을 하나하나 표시하며 설명해 주는 식이었다. 슈퍼나 카페에서도, 거리에서 사진을 찍거나 길을 물을 때도, 다들 미소와 친절로 응대했다.

독재 정권의 벙커와 비밀경찰

과거 독재 정권 시절 도청 및 감시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벙크아트 2의 전시실. 김남희 제공

온몸에 칼자국이 가득한 사내의 인상이 사나워 피했는데, 알고 보니 그 칼자국은 가족과 이웃을 지키려던 싸움이 만든 거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남자. 수도 티라나가 주는 느낌이었다. 빈말로라도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도시였다. 온 도시에 상흔이 가득했지만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꿈틀거리는 곳이었다. 티라나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벙크 아트 2’를 둘러보고 나니 그런 느낌이 더 굳어졌다. 이 나라에는 엔베르 호자라는 특이한 독재자가 있었다. 무려 40년 이상 알바니아 노동당 서기장으로 재임했다. 그는 내부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겠다며 극단적인 통제와 검열로 알바니아를 통치했다. ‘벙크아트 2’는 티라나에 있는 두 개의 핵 벙커 중 한 곳인데 내무부 건물과 이어진 지하 대피소다. 이곳은 엔베르 호자의 편집증적인 ‘벙커 프로젝트’의 일환인데, 그는 알바니아 전역에 70만개 이상의 벙커를 만들었다. 강경한 스탈린주의자였던 호자는 소련이 반스탈린주의로 돌아섰을 때 소련을 비판하며, 소련에 유화적인 국가들과 관계를 단절해 버리는 강단을 발휘했다. 쇄국 정책으로 고립된 알바니아를 통치하던 호자는 외부의 적을 강조하며 내부의 적들을 쳐냈다. 벙크아트 2는 공산주의 시절에 창설된 국가안보국을 통해 자행한, 반대 세력에 대한 정치적 박해와 탄압을 폭로하는 곳이다. 암흑의 역사를 드러냄으로써 처참한 과거조차 역사적 기억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고문과 사형이 행해졌던 ‘나뭇잎의 집’. 김남희 제공

벙크아트 2를 나와 찾아간 곳은 ‘나뭇잎의 집 박물관’(The House of Leaves Museum). 나뭇잎의 집 또한 공산주의 시절 알바니아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빽빽한 담쟁이덩굴에 덮인 이 집은 티라나 시민들 사이에 수많은 루머를 만들어냈던 공포의 집이었다.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는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이 집은 공산주의 정부 수립 이후 국가안보국의 비밀경찰인 ‘시구리미’의 본부였다. 반대 세력에 대한 감시와 체포, 고문과 사형이라는 사악한 임무가 이곳에서 자행되었고, 무려 6천명을 재판도 없이 사형에 처했다. 방 하나에는 그렇게 죽은 이들의 이름과 나이가 적힌 천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그 시절에 쓰던 도청 기구는 물론, 비밀경찰의 진술서, 감시와 심문 작업에 대한 자료들도 꼼꼼히 모아놓았다. 뒷마당에는 독재정권에서 일했던 이들의 이름과 직책을 얼굴 사진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만이 비참한 과거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폭압의 시절을 잊지 않고자 애쓰는 시민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일었다. 우리에게는 이토록 통렬히 수치스러운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이 있는 걸까? 문득 철거된 남산 안기부,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된 국군기무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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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 정전…그리고 ‘고난의 트레킹’

어두운 과거에서 빠져나오니 푸르른 하늘빛이 더 눈부셨다. 10월 중순인데도 티라나는 따뜻했다. 올리브나무가 자라는 남쪽이라 티라나의 낮 기온은 25~26도. 늦여름으로 돌아간 것 같아 내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티라나에서 이틀을 보낸 후 나는 북쪽 프로클레티예산맥으로 향했다.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티라나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가니 호수를 낀 도시 슈코더르. 하룻밤을 머문 다음날 새벽, 호텔로 픽업 온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리니 코만 호숫가. 이곳에서 배로 갈아탔다. 북부 산간 지역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코만 호수를 가로지르는 여행이라더니, 배가 좁은 물길을 가르며 나아가는 동안 기암괴석이 가득한 산이 계속 이어졌다. 그 첩첩산중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곳에 띄엄띄엄 작은 민가가 하나씩 보였다. 도대체 이런 척박한 바위산에서 뭘 해서 먹고사는 걸까. 외롭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선착장에 배가 섰다. 이번에는 대기하고 있던 미니밴을 타고 다시 한 시간을 달리니 발보나. 높은 산 아래 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작은 집들이 이어지는 산간 마을이었다. 갑자기 여름에서 늦가을로 건너온 것 같은 날씨와 풍경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마을 전체에 전기가 나갔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방은 추웠다. 작은 방에는 달랑 침대만 있을 뿐, 앉을 의자 하나 없었다. 이른 시간부터 침대에 누워 헤드 랜턴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거센 비바람 소리는 그때까지도 잦아들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실내 식사 공간조차 없어서 마당 앞에 놓인 테이블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그때는 몰랐다. 곧 이어질 트레킹에 비하면 이건 고생도 아니라는 것을.

정말이지 눈물 나는 하루였다. 보조 배터리는 물론이고 휴대폰 충전도 못 했지, 밤새 비가 내린 후라 길은 미끄럽지, 산을 넘는 데만 7~8시간이 걸린다는데 전기 들어오기를 기다리다 출발도 늦었지, 초반에 두 번이나 길을 잃고 헤매느라 시간을 허비했지, 곧 그칠 거라던 비는 고갯마루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쏟아지지…. 비옷도 없이 방수 점퍼만으로 버티며 산을 올랐다. 800m를 올라가서 1800m 고갯마루에 다다른 후 반대편으로 다시 1000m를 내려와야 하는 산행 내내 날씨와 시간, 휴대폰 배터리 때문에 마음 졸인 걸 생각하면…. 두 번은 못할 짓이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간 상태에서 길을 잃게 될까 봐 어찌나 불안하던지. 힘들게 올라간 발보나 패스에서는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가렸고. 자연 속에서 완벽한 자유와 해방감을 누리는 일은 이번 생에는 포기했다. 타고난 악조건 때문인데 첫째는 여자라서, 둘째는 겁 많은 성격 탓에, 셋째는 지독한 길치라서. 그나마 길치라는 치명적 약점은 구글맵이나 훌륭한 트레킹 앱 덕분에 좀 나아지긴 했다. 물론 휴대폰이 무용지물이 되면 다시 재앙 수준으로 헤매게 되겠지만. 디지털 라이프라는 게 이렇게나 어이없이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세스의 ‘블루 아이’를 향해 가는 트레커들. 김남희 제공

그래도 하산길에는 날이 개어서 가을 산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걸을 수 있었다. 발보나가 공산주의 시절에 건설된 마을인데 비해 세스는 500년 이상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곳이어서 더 정감이 가는 분위기였다. 숙소에서 차려준 푸짐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충만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보조 배터리를 100%까지 충전해 놓은 후에.

한 여행자가 ‘블루 아이’로 뛰어들고 있다. 김남희 제공

다음날은 세스 마을에서 왕복 6시간이 걸리는 ‘블루 아이’까지 하이킹을 나섰다. 푸른 물감을 휙 뿌린 듯한 가을 하늘 아래 산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보였다. 오붓한 길을 따라 이어지는 계곡의 물이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가을 색으로 갈아입은 나뭇잎의 색이 얼마나 고운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은 20대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친구들은 어찌나 귀여운지, 발걸음이 전날과는 다르게 놀랍도록 가벼웠다. 세 시간을 걸어 도착한 블루 아이는 짙푸른 물빛이 시리도록 맑았다. 손을 넣어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그야말로 차갑고 투명한 푸른 눈이랄까. 그 물로 수영복을 입은 20대 친구들이 뛰어들고 있었다. 함께 걸어온 호주 아이들이 나더러도 뛰어들라고 종용하는데 나는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물가의 바위에 앉아 배낭에 넣어 간 샌드위치를 꺼냈다. 노랗고 붉게 물든 나무들 아래로 천천히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햇살이 계곡의 바위를 따스하게 데우는 가을날 오후였다. 영화 ‘테이큰’을 보며 싸웠던 남자를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알바니아 사람들은 깊은 상처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살아내고 있다고.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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