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처럼 회자되는 한일전 참패…감성돔 낚시는 ‘두뇌싸움’ [ESC]

한겨레 2023. 12. 3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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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해?
한국 최고인기 어종 낚시대회
원정팀 일본, 바다흐름 읽어 승리
여러 변수 복잡한 두뇌싸움 필요
2021년 겨울 추자도에서 낚아올린 53㎝ 크기 감성돔. 낚시 인생 10년 만에 처음으로 잡은 ‘오짜’(50~60㎝ 물고기)였다.

경남 남해와 거제, 전남 여수 같은 곳에는 도시에서 직장 잘 다니다가 낚시에 ‘미쳐’ 바닷가로 내려와 낚싯배 선장을 하거나 낚시점을 차린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까지 하셨소?”라고 물으면 대체로 “어느 추운 겨울날…어느 갯바위였지….” 로 시작하는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물고기가 바로 감성돔이다. 바다의 백작. 꿈의 물고기. 낚시꾼들의 로망. 도대체 왜 많은 사람들이 감성돔이라는 물고기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걸까.

감성돔 낚시 ‘긴장-저항-공포-성취’

1990년대 이전엔 주로 대낚시를 이용해 감성돔을 낚았다. 낚싯대 길이만큼의 낚싯줄을 이용해 주로 갯바위나 방파제 인근 5~10m 근방을 노렸다. 그런데 서양에서 사용하던 줄 감는 도구 ‘릴’을 바다낚시에 사용하면서 감성돔 낚시 방법이 한 차례 진화한다. 미끼를 200m까지 멀리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바다낚시 한-일전을 통해 한국 낚시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진다. 한국의 최고 인기 어종인 감성돔을 노리는 대회였고 일본 낚시꾼들이 주로 낚는 어종은 벵에돔이었다. 게다가 한국 측은 27명의 낚시 명인들이 참여했고, 일본 측 참여 인원은 단 5명으로 한국의 낙승이 예상됐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일본 참가자가 1·2·3위를 싹쓸이하며 한국 감성돔 낚시꾼들에게 치욕을 안겼다.

지난해 2월 추자도 갯바위에서 감성돔 낚시 중인 모습.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는 한-일전, 그것도 홈그라운드인 한국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고기를 일본에 빼앗긴 대회. 충격을 받은 한국 낚시꾼들이 패배의 원인을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그 비밀은 찌에 있었다. 감성돔 낚시는 여러 변수에 의해 성패가 갈리는 매우 섬세한 작업이다. 낚싯바늘이 바닥에 가까워서 아니면 수중에 떠 있어서, 찌가 무거워서 혹은 가벼워서, 날씨가 나빠서 혹은 좋아서 등등. 경험을 통해 여러 변수에 대응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잡을 수 있는 게 감성돔이다. 대회 당일 일본 낚시꾼들은 바다의 흐름을 읽으며 감성돔이 바닥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찌를 사용했고 그 판단은 적중했다. 한-일 낚시꾼의 작은 판단의 차이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강렬한 패배를 낳고 말았다. 감성돔 낚시는 이렇게 어렵다. 이런 어려움이 도전의식을 북돋는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여유를 즐기며 서있는 낚시꾼의 모습이지만 그 풍경 속 낚시꾼의 머릿속은 감성돔을 낚기 위해 굉장히 복잡한 연산과 시뮬레이션이 진행 중인 것이다.

그래서 한 마리를 잡았을 때의 희열도 크다. 감성돔의 국내 최대어 기록은 2019년 추자도에서 잡힌 65.5㎝다. 60㎝가 넘어가는 고기는 평생 만나 볼까 말까 한 사이즈이고, 낚시꾼들이 본격적으로 꿈꾸는 대물(50㎝ 이상)도 손에 넣기가 쉽지 않다. 내가 잡은 가장 큰 감성돔은 2021년 겨울 추자도에서 낚아 올린 53㎝짜리였다. 그날의 ‘대박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항상 감성돔을 잡아 오겠노라 큰소리 치고 나가지만 열에 아홉은 빈손이다. 쉬는 날 집을 나와 혼자만의 취미를 즐기는 명분을 아내에게 제시하기 위해 가끔은 선장님께 한 마리 경매로 구해줄 수 없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산 감성돔 대물은 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50㎝ 크기는 대략 20만원을 호가한다. 자존심을 위해 쉽게 지갑을 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게 귀하디귀한 고기라서 물 위로 은색 어체가 떠오를 때의 희열은 그저 짜릿하다. 찌가 들어갈 때의 긴장감, 낚싯대를 당기는 저항감, 고기의 힘에 낚싯줄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 그럼에도 잡아냈을 때의 성취감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감성돔 낚시의 카타르시스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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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풍과 함께 오는 ‘대물 감성돔’

연중 감성돔 낚시의 최적기는 차가운 북서풍이 파도를 몰고 오는 한겨울, 바로 지금이다. 사실 감성돔은 1년 내내 잡힌다. 하지만 낚시꾼들은 감성돔을 귀하게 여겨 1년 내내 잡지 않는다. 가을에 낚시를 시작해 감성돔이 알을 품기 시작하는 4월 초가 되면 낚싯대를 접는다. 잡아도 놓아주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그 시기에 고기를 욕심내다간 다른 낚시꾼들과 싸움까지 벌어진다. 5월은 아예 법으로 잡는 걸 금지한 금어기다. 산란이 끝나 여름으로 넘어가면 감성돔은 먼바다로 떠나는데, 그래서 잘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산란을 하며 영양분을 다 쓴 상태라 “오뉴월 감성돔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할 정도로 맛이 없어진다. 그리고 늦가을이 되면 먼바다에서 감성돔이 귀환한다. 처음엔 30㎝ 정도의 젊은 개체가 갯바위로 들어와서 아기자기한 손맛을 주고, 삭풍에 파도가 몰아치고 손끝이 쨍해지는 시기가 되면 등 지느러미를 곧추세우고 강력한 파괴력으로 낚시꾼들을 굴복시키는 진정한 대물 감성돔이 돌아온다.

2021년 겨울 추자도에서 낚아올린 53㎝ 크기 감성돔. 낚시 인생 10년 만에 처음으로 잡은 ‘오짜’(50~60㎝ 물고기)였다.

우리나라 겨울 감성돔 낚시의 메카는 제주의 추자도, 전남 신안의 태도·가거도 세 섬을 첫손에 꼽는다. 가는 길이 험하고 풍랑주의보가 떨어지면 나오기도 힘든 낙도. 하지만 감성돔의 손맛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들은 그 험한 뱃길을 감수하고도 겨울 감성돔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나는 올해 단 한 번도 감성돔 낚시를 가지 못했다. 길이 멀기도 하고 한 번 떠나면 쉽게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서풍이 불어온다는 뉴스만 들어도 세포가 살아나고 심장이 뛴다. 짜릿한 손맛을 느낄 기대에 손이 떨린다. 그래서 나는, 아니 우리 낚시꾼들은 모두 겨울을 좋아한다. 며칠 후, 제주도 광고 촬영이 잡혔다. 이성은 나에게 일이나 하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낚싯대는 들고 가 볼 참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북서풍이 불어와 촬영 일정이 쉬어 가는 사이 갯바위에 설 기회가 찾아올지도.

글·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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