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성매매 시킨 어머니를 죽였다”…막장 근친살해에 공명한 까닭 [나쁜 책]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2. 30.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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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24] 셀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금서기행, 나쁜 책]은 전 세계 현대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국가가 발행을 중단시킨 문학, 좌우 논쟁을 촉발한 논픽션, 외설의 누명을 쓴 예술, 동서고금의 필화 스캔들을 다룹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는 ‘친족 살해’일 겁니다. 특히 어머니를 살해하는 범죄는 용납 불가능한 금기였습니다. 공개석상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부터가 터부시되었지요.

스페인에선 좀 달랐습니다. 어머니를 죽이는 잔혹한 장면을 묘사했던 끔찍한 소설이 평단과 대중에게 호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책을 쓴 작가는 1989년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습니다.

스페인 대문호 카밀로 호세 셀라의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입니다. 이 책을 원작 삼은 영화는 칸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받았습니다. ‘돈키호테’ 이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스페인 장편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들여다봅니다.

영화 ‘파스쿠알 두아르테(Pascual Duarte)’의 한 장면.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원작 삼은 영화로, 주인공을 맡은 배우 호세 루이스 고메스는 ‘친모를 죽이기까지의 과정’을 연기한 공로로 1976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현재 유튜브에서 무료 감상 가능합니다. 사진은 두아르테와 아내 롤라가 함께 했던 시절의 모습. [IMDb]
카밀로 호세 셀라의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영문판과 한국어판. 영문판 표지 좌측 하단에 1989년 노벨상 수상작이란 문구가 선명합니다.
내 막냇동생의 두 귀를 돼지새끼가 씹어 먹었다
한 약국에서 회고록 뭉치가 발견됩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란 사형수가 남긴 회고록이었습니다. 그건 ‘살인 회고록’이었지요. 두아르테는 55세. 그는 죽음을 앞둔 재소자로, 교수형 직전입니다.

두아르테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삶을 차분하게 돌아봅니다. 스페인 작은 마을 바다호스(Badajoz)에서 태어난 두아르테는 폭력에 노출된 불행한 유년을 보냈습니다. 부모는 그에게 불행을 가르치는 악인들이었습니다.

‘짐승’인 아버지는 혁대 버클로 소년 두아르테를 후려 팼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깽판을 치며 자신과 아들을 때린 남편에게 키스를 해주었지요. 소년 시선으로 이해 불가능한 가정이었습니다.

소년 두아르테는 어머니를 향한 증오감을 키워갑니다. 동생 마리오의 죽음을 계기로 두아르테는 모성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란 두아르테는 연쇄살인범이 되지요. 사진은 영화 ‘파스쿠알 두아르테’에 등장하는 두아르테와 그의 어머니 모습. [영화 ‘파스쿠알 두아르테’ 캡쳐]
어머니도 두아르테를 포함한 삼남매에게 자애롭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다른 남성과 간통하여 이복동생을 낳기도 합니다. 집안꼴이 엉망 그 자체였지요.

어느 날, 두아르테의 막냇동생 마리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터집니다. 두아르테의 부모는 돼지를 집안에 대충 풀어놓고 키웠는데, 마리오가 돼지에게 두 귀를 뜯어먹히는 참극이 벌어진 겁니다.

제대로 된 치료는커녕, 어머니는 마리오에게 약만 대충 발라줍니다. 그리고는 마리오가 불결하다며 바닥에 음식을 던져주고 그냥 바닥에서 키웁니다. 어린 마리오는 얼마 후 항아리에 거꾸로 빠져 죽은 채 발견됩니다. 학대 속에 방치됐던 동생 마리오가 어이없는 모습으로 사망한 겁니다. 무력했던 소년 두아르테는 그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을 강하게 의심합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 ‘어머니는 아들(마리오)의 죽음에도 역시 울지 않았습니다. 어린 것(마리오)의 불행을 위해 흘릴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심장이 굳어버린 여자, 그 여자가 내 어머니였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마음속에서 그녀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 원수가 되었는지를 분명히 해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증오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향할 때만큼 지독할 수 없고….’ (60~61쪽)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살인범 두아르테가 감옥에서 쓰는 회고록 형식의 소설입니다. 두아르테는 자신의 유년 시절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험했던 삶의 궤적을 차분한 문체로 써 내려갑니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연쇄 살인범이면서도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문제적 인물이 바로 두아르테입니다. [영화 ‘파스쿠알 두아르테’ 캡처]
참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두아르테의 아버지가 ‘미친개’에게 물리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심하게 몸을 떨던 아버지는 눈앞에 보이는 누구라도 물어 뜯어버릴 기세였습니다. 광견병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진 겁니다.

두아르테와 어머니는 아버지를 진정시키려 벽장에 가뒀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벽장 안이 조용했습니다. 벽장 문을 열자, 아버지는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지요. 그런데 아버지를 본 어머니 반응이 또 기이합니다. “검붉은 혀를 절반 정도 내민 (아버지의) 얼굴”(54쪽)을 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두아르테의 어머니는 왜 가족의 연이은 죽음에도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걸까요. 가족의 죽음이란 거대한 상실 이면에서, 어린 두아르테의 분노는 커져만 갑니다.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의 명패. [HombreDHojalata]
간통도 모자라… 며느리 성매매시킨 시어머니
시간이 흘러 두아르테는 성인이 됩니다. 그는 사랑했던 애인 롤라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불행은 아직 끝이 아니었습니다. 롤라가 첫 아이를 임신했는데, 유산의 고통을 겪고 말았습니다. 한 해가 지나 둘은 다시 임신했지만 어렵게 얻은 아이를 11개월 만에 땅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유년 시절 가정에서 겪었던 폭력이, 성인이 되어서는 ‘운명의 폭력’으로 둔갑하고 있던 겁니다.

상실을 거듭하면서, 두아르테는 롤라와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악담과 욕설이 둘 사이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두아르테는 자신이 ‘집’이라는 이름의 불행한 거미줄에 걸렸음을 알게 됩니다. 그토록 경멸했던 자신의 부모를 닮아가고 있었으니까요.

두아르테와 아내 롤라는 한때 너무나도 사랑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아르테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부모의 모습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귀지옥인 집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IMDb]
두아르테는 아귀지옥인 이 가정을 잠시 떠나기로 다짐합니다. 두아르테는 홀로 길을 떠나 스페인 전역을 돌아다니는 방황 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2년 만에 보는 가족이었습니다.

집에 오니, 롤라가 어두운 낯빛으로 이런 말을 하네요. “나는 아이를 낳을 거예요.” 상간남이 누구인지 무섭게 추궁하니, 롤라는 두아르테의 여동생 로사리오의 남자친구가 아이의 생부(生夫)라고 실토합니다. 두아르테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바로 그 자식이었습니다.

두아르테는 자신의 어머니가 며느리 롤라에게 ‘포주(抱主)’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가 죽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살인에 이어, 불륜남 그 녀석도 두아르테의 손으로 숨이 끊어져 버립니다. 두 번째 살인이었지요.

검거된 두아르테는 28년형을 받았습니다. 광기로 물들었던 자신의 유년,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괴롭힌 어머니. 그 모든 일의 시작이 자신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두아르테는 확신합니다.

두아르테에게 삶은 폭력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어려서는 부모의 폭력에 노출되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삶이 주는 폭력에 익숙해져야 했으니까요. 그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어머니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어머니의 집을 찾아갑니다. [IMDb]
두아르테는 살인범인데도 모범수로 복역하면서 고작 3년 만에 출소합니다. 집으로 간 두아르테는 어머니를 살해할 광기의 칼날을 갑니다. 어쩌면 그가 처음부터 살해했어야 하는 건 어머니였는지도 모릅니다. 칼을 갈면서, 두아르테는 살인을 사유합니다.

◎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늑대의 발걸음처럼 느리고 구렁이의 몸놀림처럼 징그럽게 다가옵니다. 우리를 완전히 미쳐버리게 하고 아주 슬프게 하는 광기는 언제나, 마치 안개가 평원을 공격하듯, 결핵이 폐를 공격하듯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도착합니다. 어느 날 사악함이 나무처럼 자라고 살쪄서….’ (172쪽)

그리고는 이어 바로 그 논란의 장면이 시작됩니다. 차마 옮겨적을 수 없는 ‘모친 살해’ 장면 말입니다. 숨을 거둔 두아르테의 모친은 유죄일까요, 무죄일까요.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초판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소설입니다.
“자네가 감옥에 가고 싶다면 혼자 가게”
자, 여기까지가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의 전체 줄거리입니다. 만약 지금 이 소설이 출간된다면 아마도 존속살해라는 끔찍한 설정 때문에 외면당할 가능성이 크겠지요. 내용이 거북한데다, 끔찍할 정도로 세밀한 장면으로 채워졌으니까요.

이 책은 출간 즉시 금서로 지정됩니다. 정동섭 전북대 교수 설명에 따르면,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내용이 불량하고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큰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당대 유명했던 스페인 대표 작가 피오 바로하(1872~1956)는 당시 신예였던 카밀로 호세 셀라가 이 책의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이런 답변을 보내며 거절했습니다. “만일 자네가 감옥에 가고 싶다면 혼자 가게나.

당대 기준으로도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소설을 이해할 순 없었을 테니까요.

젊은 시절의 카밀로 호세 셀라. [bvpb.mcu.es]
책이 로마에서 이탈리아어판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어판으로 연이어 출간됐지만 정작 책은 작가 셀라의 고국에선 금서였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이 재판(2쇄)을 찍자 경찰이 금서를 회수하러 출동했을 때, 서점에선 이 책이 완판된 직후였다고 전해집니다.

당대 스페인 독자들은 이 끔찍한 소설에 왜 열광한 걸까요. 당대 스페인의 모든 독자들에게만 유독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증오심이 있었던 걸까요.

그럴 가능성은 적습니다. 작품의 성공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풀리지 않는 복잡성의 함수에 가깝습니다. 대중적으로, 또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은 작품은 반드시 표면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회 내부의 기저 심리, 일종의 금기시됐던 무의식을 건드릴 때라야 가능하다는 건 널리 증명된 사실입니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면,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의 성공은 이런 명제가 가능해집니다.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의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당대 스페인 시민들 내면의 심리적 무의식 중 한 부분을 강하게 건드렸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던 걸까요. 이를 위해선 당대 스페인을 휩쓸었던 사건, 당대 스페인 2000만 시민의 심리에서 충격적인 내파(內破·implosion)를 일으킨 사건, 즉 ‘제2차 세계대전 최종 예행연습’으로 불리는 스페인 최악의 전쟁 스페인 내전(1936~1939)을 되짚어야 합니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 건립된 카밀로 호세 셀라 동상의 모습. 작가 셀라는 198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그의 노벨상 여정 맨 처음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논쟁작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 있었습니다. [Luis Miguel Bugallo Sánchez]
폭력과 증오는 사악한 세상이 잉태하는 것이다
작가 셀라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집필을 시작한 건 1940년입니다. 책이 발표된 시점은 1942년이지요. 따라서 스페인 내전의 상흔이 아직 지워지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스페인 내전이란, 프란치스코 프랑코가 이끌었던 군부가 쿠데타 반란을 일으켜 벌어진 참극입니다. 프랑코의 군부는 우파진영을 대표했고 반대진영인 공화파는 공산당과 아나키스트 등 좌파였는데, 이 전쟁은 당대 이데올로기의 전장(戰場)이라고 불릴 정도로 복잡한 양상 속에서 전개됐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제압하고, 억눌린 폭력이 다시 상대의 폭력을 진압하는 양상이었습니다. 내전 결과 프랑코의 군부가 승리하면서 스페인은 긴 독재의 암흑기로 돌입합니다.

이때, 스페인 내전을 통해 당시 스페인 국민 2100만명 중 100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스페인 시민들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벌어진 유혈사태 속에서 오직 생존만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1936~19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참상의 모습. ‘제2차 세계대전의 최종 리허설’이란 별명이 붙은 이 내전에선 스페인 시민 100만명이 사망했습니다. 결국 군부 지휘자 프랑코가 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스페인은 긴 독재로 돌입합니다. [HominisCon·Wikimedia Commons]
두아르테의 가족은 일종의 스페인 사회 전체의 알레고리를 형성합니다. 알레고리란, 주제 A를 말하기 위해 A를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소재 B를 이용해 그 유사성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문학적 기법을 뜻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아르테의 부모는 폭정으로 시민들을 제압했던 프랑코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폭력의 원인은 두아르테의 부모에게 있었으니까요. 이 모든 죽음에 책임을 지닌, ‘미친 개’에 물린 두아르테의 부친은 현실의 프랑코정권 자체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고 온정과 사랑 대신 무책임한 삶의 태도로 일관한 두아르테의 모친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지요.

반면, 돼지에게 두 귀를 먹혀버린 남동생 마리오는 독재 치하에서 귀를 닫아야 했던 시민들의 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두아르테와 그의 어린 동생들은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키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종해야 했고, 그런 삶 속에서 각자도생을 도모해야만 했습니다. 스페인 시민들처럼 말이지요.

스페인 내전 초기 26명의 공화당원이 살해된 무덤의 모습. [Mario Modesto Mata]
이 책의 제목이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아니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아르테가 견뎌야만 했던 유년시절의 폭력은 지배자(전쟁 당사자)의 폭력이 피지배자(스페인 시민)의 삶으로 ‘이식’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따라서 불행을 유산처럼 물려주었고, 증오를 좌우명처럼 가르친 두아르테의 어머니는, 그런 점에서 두아르테의 눈에 ‘유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중심에 섰던 프란치스코 프랑코(사진 맨 앞줄 가운데)의 모습. 1936년 스페인 내전 초기 사진으로 그는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쥐었고 독재자로서 반대파를 탄압했습니다. [Wikimedia Commons]
200쪽도 안 되는 책에 서술된 5개의 비밀문서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의 형식 실험도 깊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 책은 일단 두아르테가 교수형 직전 감옥에서 쓴 회고록(A)이 이 책의 중심을 이룹니다. 회고록은 ‘로페스’라는 이름의 귀족에게 발송되는데, 두아르테가 로페스에게 쓴 편지(B)가 A보다 앞서 서술됩니다. 또 A를 읽은 귀족 로페스가 “이 회고록을 불태워버리라”고 명령한 유언장(C)이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회고록(A) 전체를 옮겨쓴 필사자의 메모장(D), 두아르테가 남긴 네 줄짜리 쪽지(E)까지 한 권의 책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독자는 마치 형사사건 기록물을 들춰보는 듯한 프로파일러가 되는 착각까지 들 정도이지요.

꽤 입체적인 구성이지요.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면, 소설엔 또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카밀로 호세 셀라의 서명. [Wikimedia Commons]
일단 두아르테가 모친을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한 해는 1922년입니다.

그런데 책의 메모에 따르면, 두아르테는 모친살해의 죗값으로 1935년(혹은 1936년)까지만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납니다. 무려 세 명을 살해한 데다 재범인데도, 고작 약 13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겁니다. 그러나 두아르테는 결국 1937년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두아르테가 감옥에서 나온 1935년(혹은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약 1~2년간의 공백기가 발생한다는 얘기입니다. 책의 문장을 촘촘히 살펴보면, 두아르테가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 진짜 이유는 모친살해가 아니라 한 지주의 살인사건 피의자였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영화 ‘파스쿠알 두아르테’ 포스터. 두아르테 살인은 단지 개인의 원한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살인은 충분히 사회적이며, 동시에 사회 전체의 살의를 대변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두아르테의 살인에 공감이 간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IMDb]
즉, 두아르테는 ①아내와 상간남 살인으로 3년 복역, ②모친 살해로 약 13년 복역 후 풀려났다가 결국 ③지주 살인으로 다시 갇혀 최종 교수형에 처한 겁니다. ③의 경우, ‘전쟁 주체의 도구(정권의 끄나풀)’가 되어 누군가를 살해하는 데 앞장섰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두 차례의 교도소 수감(①과②)을 통한 두아르테 교화는 불가능했고(제도의 실패), 교도소 시절 두아르테를 아끼며 교육했던 가톨릭 사제도 그의 재범을 막지 못했습니다(영성의 실패). 사회의 제도도 종교의 영성도 폭력의 발생을 제지하지 못했다는 점이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에 숨겨진 또 하나의 깊은 주제입니다.

결국 두아르테의 실패는 한 선량한 시민의 실패이며, 나아가 ‘인간의 실패’라는 주제를 형성합니다.

‘검열관 출신’ 셀라의 책이 금서가 된 아이러니
전쟁 이후에 적힌 문학은 ‘전후문학(戰後文學·postwar literture)’이라고 부릅니다. 전쟁 직후에 적힌 소설을 말합니다. 전쟁 경험은 그 전쟁을 경험한 모든 인간에게 무형의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스페인에서 전후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시기는 좀 다르지만, 한국의 6·25전쟁 이후 가장 성공적으로 평가받는 책 최인훈의 ‘광장’처럼 말이지요.

전쟁 이후에 쓰인 소설을 뜻하는 전후문학의 대표 소설들. 왼쪽부터 귄터 그라스 ‘양철북’, 바오 닌 ‘전쟁의 슬픔’, 최인훈 ‘광장’의 표지. 세게에서 가장 널리 읽힌 전후문학 책들입니다. 전쟁 직후에 적힌 이 소설들은 ‘전쟁을 겪은 인간의 첫 번째 표정’이 됩니다.
전후문학의 거친 비교가 되겠지만, 작가 셀라는 주인공 두아르테를 통해 폭력의 원인을 직접 제거하는 방향(모친 살해)으로 나아가는 반면, 작가 최인훈은 주인공 이명준을 통해 좌우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을 무력화시키고 폭력의 원인으로부터의 탈주(중립국행)를 선택하게 합니다.전쟁 속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대동소이하지만, 전혀 다른 결말이지요.

두아르테의 살인과 이명준의 자살이란 점도 방향이 다릅니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타인을 살해할 것인가, 자신을 살해할 것인가의 기로에 두 작품은 위치합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도 전후문학 대표작입니다. 전쟁 속에서 ‘육체적 성장을 스스로 멈춰버린 소년’ 오스카의 시선을 통해 아예 인간(정확히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해 버리지요. 베트남전쟁 전후문학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은 작가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10년의 상처를 보여주는데, 주인공 끼엔을 통해 인간의 절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역시 ‘자기 부정’이자 ‘세계 부정’이란 점에서 동등한 지위를 형성합니다.

카밀로 호세 셀라는 198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노벨상 메달 모습과 노벨상 홈페이지의 카밀로 호세 셀라의 수상기록. [노벨상 홈페이지 캡처]
사실 카밀로 호세 셀라의 문학적 위상은 독특합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두 가지의 아이러니를 형성합니다.

작가 셀라는 스페인 내전을 겪은 시민들의 무의식을 건드려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올랐지만, 그는 프랑코의 군부에 참전한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폭력의 원인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작가 스스로가 폭력의 가담자였다는 얘기지요. 또 그는 금서의 작가였지만,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이후 검열관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가 검열관으로 일한 이후에도 그의 다음 소설 ‘벌집’은 또 금서가 됩니다.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의 작품이 금서가 되는 아이러니라니, 인생이든 문학이든 참으로 복잡한 요물입니다.

어쨌든,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 가진 사회문화적 위상까지 부정하진 못할 겁니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작품은 작가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자와의 공동 소유물이 되니까요. 어쩌면 ‘어머니를 살해한 소설’이 아직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을 둘러싼 가장 큰 아이러니일 테지만요.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작가 셀라의 동상. 세계 전체를 바라보려는 눈과 펜을 든 손, 그리고 사유하는 지성과 내리쬐는 태양만 주어진다면 세계 속 인간을 움켜쥘 책 한 권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Zarateman]
이 기사는 다음 책과 논문, 외신기사를 참고했습니다. ◎ 카밀로 호세 셀라, 정동섭 옮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2009. ◎ 정동섭, 「범죄심리학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스페인어문학》 제36호, 한국스페인어문학회, 2005. ◎ 최정윤, 한국외대 스페인어문학과 석사논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관점으로 본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2023. ◎ 카밀로 호세 셀라의 1989년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뉴욕타임스 기사 (https://www.nytimes.com/1989/10/20/books/camilo-jose-cela-wins-nobel-prize-spaniard-broke-taboos-in-the-40s.html)

※다음주에는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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