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엔 나이 없고 새로운 길 보여"…90세 만학도의 대학 도전

허진실 기자 2023. 12. 30. 07: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전예지중·고 예비 졸업생 박도규 할아버지
80년 넘게 산 세상도 새롭게 만드는 게 공부
대전예지중·고등학교에서 박도규 할아버지(89)가 대학 면접장에 가져갔던 서류를 보여주고 있다. 2023.12.27/뉴스1 ⓒ News1 허진실 기자

(대전ㆍ충남=뉴스1) 허진실 기자 = “이제 곧 90살이 되는 나를 대학에서 받아줄지 긴장도 되고 걱정도 했죠. 그래서 면접에서 교수님들이 질문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강력하게 자기소개를 좀 했어요, 하하.”

대학 면접 경험을 묻자 박도규 할아버지(89)는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종이뭉치를 자신 있게 꺼내 들었다.

박 할아버지는 현재 노인들에게 방문요양, 방문목욕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기관을 운영 중이다. 교수들에게 보여줬다는 서류에는 기관의 사업자증명서, 명함부터 시작해 각종 관련 자격증, 심지어 주민등록등본까지 들어있었다.

“만학도라고 다를 거 있나요. 일반 학생들처럼 사회복지 분야를 왜 그리고 얼마나 배우고 싶은지 최선을 다해 설명했죠. 나중에는 교수님들이 날 보고 ‘뭘 해도 할 것 같다’고 하더라니까요”

면접장에서의 일화를 말하는 박 할아버지의 눈은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생기있게 빛났다.

대전 서구에 있는 예지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인 박 할아버지를 만났다.

1934년생인 박 할아버지는 충남 공주의 한 시골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린 날의 기억은 공주보다 유성에서 더 많다.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과수원을 하는 외갓집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박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10년간 일손을 도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박 할아버지는 “그 시절 빈농의 삶이란 게 다 그렇죠. 오죽하면 자식을 다른 집으로 보냈겠어요”라며 “다행히 외갓집이 과수원을 크게 해 할 일이 많았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외로웠던 어린 시절, 위로가 되어준 곳은 바로 학교였다. 살던 동네에서 학교까지 포장도 안 된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시간 동안 걸어 다녔다. 하지만 배우는 즐거움에 힘든지도 모르고 다녔다고 한다.

대전예지중·고등학교에서 박도규 할아버지(89)가 수업을 듣고 있다. 2023.12.27/뉴스1 ⓒ News1 허진실 기자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중 단 2명만 대전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박 할아버지였다. 만약 정상적으로 학업을 마쳤다면 할아버지는 한밭중학교의 1회 졸업생이다.

박 할아버지는 “그때는 돈을 안 내면 학교에 명단이 붙었어요. 교문을 지나갈 때마다 내 이름을 보는 심정이 어떻겠어요”라며 “근데 집에는 정말이지 손 벌리기가 싫었거든. 공부를 잘하니 선생님도 말렸지만 그만둘 수밖에 없었죠”라고 말하며 씁쓸해했다.

학교를 나온 뒤에는 돈을 벌기 위해 곧장 일을 시작했다. 특히 어린 5남매를 두고 나서는 정말이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박 할아버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호구지책(糊口之策)’이었다고 돌아봤다.

“밤 12시 이전에 잠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애들 셋이 동시에 대학을 다닐 때도 있었는데 쉴 틈이 어디 있겠어요.”

여러 직업을 거치던 중 설비공 일이 잘되기 시작했다. 가정마다 연탄에서 보일러로 바꾸는 시대 흐름을 잘 탔다. 업계에서 나름 선구적인 시도를 했던 게 인정받아 장관상, 시장상도 탔고 작지만 직접 건설회사를 설립해 사장도 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할아버지의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배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배우지 못한 게 항상 콤플렉스였죠. 조금이라도 수준 높은 주제가 나오면 대화가 턱턱 막히니까... 창피해서 어디에 물어보지도 못하고.”

대전예지중·고등학교에 한 학생이 등교하고 있다. 2023.12.27/뉴스1 ⓒ News1 허진실 기자

배우지 못한 한을 풀지 못한 채 80년이 넘는 세월 보내던 지난 2020년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왔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 예지중·고등학교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자신처럼 학업을 제때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란 걸 알게 되자 설렘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배우는 즐거움에 푹 빠져들었다. 예지중·고등학교의 수업은 만학도들이 일을 마치고 올 수 있는 오후 5시에 시작해 밤 9시까지 이어진다. 지난 3년간 낮에는 요양기관에서 일을 하고 밤이면 학교에 나오는 생활을 매일 같이 반복했다.

공부를 하며 제일 좋았던 점을 물으니 80년 넘게 살아왔던 똑같은 세상도 새롭게 느껴진다고 했다.

박 할아버지는 “보고도 몰랐던 영어단어를 알고,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회 상식을 배우는데 어떻게 세상이 똑같을 수가 있냐”며 “내 손자보다 어린 선생님들이 많은데, 이해할 때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대전예지중·고등학교에서 박도규 할아버지(89)가 같은 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있다. 2023.12.27/뉴스1 ⓒ News1 허진실 기자

내년이면 박 할아버지는 그토록 바라던 빛나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 하지만 박 할아버지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올해 대학 수시모집에서 7개 대학에 지원해 모두 합격했고 만으로 90살이 되는 내년이면 배재대 평생교육융합학부에 입학할 예정이다.

올해 신설된 평생교육융합학부는 재직자·성인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수요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다. 전공은 ‘토털라이프케어’로 선택했다. 노인요양보호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워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박 할아버지에게 다른 만학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박 할아버지는 “요즘 들어 늦게라도 공부를 시작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라며 “인생에 정말 늦은 건 없어요. 배우다 보면 새로운 길이 생기고 희망이 보여요”라고 전했다.

zzonehjsil@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