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조선의 디즈니’ 꿈꾼 선구자들
‘미키 마우스’는 1928년 상영한 디즈니 만화영화 ‘증기선 윌리’에 등장한 이래 세계 어린이들의 스타가 됐다.동그란 귀에 익살맞은 눈을 가진 생쥐 미키가 천방지축으로 벌이는 장난은 유년의 호기심을 사로잡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하다. 1930년대 신문에는 미키 마우스와 제작자 월트 디즈니를 소개하는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어린애들이나 어른이나 작금 전 세계인이 허리를 끊을만치 웃기던 미키 마우스외 기다(幾多)의 골계적(骨稽的, 풍자, 해학적) 교향악 필름을 창작한 월트 디즈니가 과연 그 예술적 재능이 인정되어 금회 영국 예술가조합으로부터 표창문을 보내고 동 조합의 명예회원에 추천되었다.’(‘미키 마우스 作者 英 大예술가들이 표창’, 조선일보 1934년6월26일)
영국 예술가조합이 ‘미키 마우스 아버지’ 월트 디즈니에게 ‘영화 예술과 세계 인류의 행복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표창하고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는 외신 보도였다.
◇미키 마우스 탄생 10주년 소개
미국 할리우드에서 열린 미키 마우스 탄생 10주년 기념제 기사도 소개됐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배우로 누구에게나 귀여움과 재롱을 받는’(‘미키마우스 탄생 10주년’, 조선일보 1938년 11월8일)다고 했다. 하버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월트 디즈니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면서 시내에서 미키 마우스 가장 행렬이 열렸다고 소개한다. 미키 마우스 사진도 함께 실었다.
1937년 12월 개봉한 디즈니 히트작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도 소개됐다. ‘허리우드의 위재(偉才)이며 또한 세계적 인기를 한 몸에 끌어모으고 있는 월트 디즈니는 혼신의 정력을 다해서 제작한 최초의 야심적 장편 만화영화 ‘백설희’(白雪姬)(RKO라디오사 제공)는 팬들의 끝없는 기대중에서 근자에 겨우 완성을 하였다고 한다.’(‘白雪姬’의 프레미아’, 조선일보 1938년3월8일) ‘백설공주’를 ‘백설희’로 번역한 것도 흥미롭다. 신문은 ‘백설공주’ 첫 상영에서 일곱 난쟁이로 분장한 배우들이 갖은 애교를 다 부린 덕분에 극장이 웃음바다가 됐다고 소개했다.
◇'미키 마우스’ 패러디한 일본
미키 마우스가 등장한 어떤 영화가 조선에서 상영됐는지는 불명확하다. 1930년대 일본에서 미키 마우스 영화가 파라마운트 사(社)를 통해 상영된 것을 보면, 유학생들은 이미 접했을 것이다. 경성 영화관에서도 상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1929년 9월 미키마우스 관련 애니메이션이 상영됐고 1930년 ‘증기선 윌리’가 선보였고 ‘미키 마우스의 오페라 구경’ ‘쥐의 댄스’ ‘미키의 유령의 집’ ‘미키의 킹콩토벌’ 등이 잇달아 소개됐다. 미키 마우스가 얼마나 인기있었던지 1935년 간사이 지역의 스나가와(砂川) 유원지 안내 팜플렛에 미키 마우스가 등장할 만큼, 친숙한 캐릭터로 떠올랐다.
1930년대에 미키 마우스를 본 뜬 일본산(産) 애니메이션이 잇달아 등장한 사실도 흥미롭다. 오이시 이쿠오(大石郁雄) 감독의 1931년 작 ‘쥐의 집보기’가 대표적이다. 1분 10초짜리 짧은 단편으로 둥근 귀, 가는 팔과 다리 등 미키 마우스와 비슷한 쥐가 주인공이다. 모방이나 패러디, 또는 ‘짝퉁’이라는 얘기까지 들을 만하다.
일본은 미키 마우스를 본 뜬 만화영화를 계속 내놓았는데, 1934년작 ‘장난감상자 제3화 그림책 1936년’은 미키 마우스를 악역으로 그렸다. 장난감들의 섬에 쥐가 박쥐를 타고 날아와 섬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섬에 있던 동물들이 거절하자 박쥐, 뱀, 악어 군단을 이끌고 공격하지만, 모모타로의 도움을 받은 동물들이 맞서싸워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이다. 모모타로(桃太郎)는 일본의 전설적 영웅으로 복숭아를 뜻하는 모모와 남자 아이 이름인 타로가 합쳐진 이름이다. 책,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미국, 중국과 갈등을 빚었다.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국제적 고립을 자처한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미키 마우스가 가상 적국으로 등장한다. 몇 년 후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전조로도 읽힌다.
◇'조선의 디즈니’를 꿈꾼 김용운, 임석기
1936년 조선에서도 디즈니를 꿈꾸며 만화영화 제작에 뛰어든 선구자들이 있었다. 종로구 예지동에 청림촬영소를 세우고, ‘개꿈’이라는 만화영화를 촬영한 김용운, 임석기다. ‘‘미키!마우스’ ‘베티—부—푸’ 등(等)의 외국 만화영화는 이름이 전세계에 펼쳐 세살먹은 아이들도 벌써 주인공의 낯을 익히게끔 되어있다. 만화영화가 보통 영화와 달라 일일히 화가의 수공(手工)을 빌어 수만매(數萬枚)의 그림이 종합(綜合)되어 비로소 한권(卷)의 작품이 생겨나는 만큼 기계문화가 발달된 금일(今日)에 있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 하는 것은 더 물을 필요가 없거니와 조선에 있어서는 더구나 이 만화영화의 생산이 일품(一品)도 없었는데 얼마 전부터 이 방면에 뜻을 두고 연구해 오던 김용운(金龍雲),임석기(林錫基) 양씨가 처음으로 부내 예지동 164번지에 청림촬영소라는것을 세우고 작품제작(作品製作)에 골몰하고 있다.’(’조선의 토—키만화 ‘개꿈’의 初登塲’, 조선일보 1936년11월25일)
임석기씨는 작곡까지 겸했다고 한다. 기사와 함께 실린 강아지 일러스트는 익살스럽다. 첫 유성 만화영화가 될 뻔한 ‘개꿈’은 제작이 중단됐거나 상영이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 시비 달고 다닌 디즈니
미키 마우스는 등장 초부터 저작권 시비를 달고 다녔다. 1936년 호주의 라디오 제작사가 자사 신제품에 ‘미키! 마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디즈니에 의해 고발당했던 모양이다. ‘디즈니사는 호주 ‘상공성상표국’에 ‘미키 마우스는 이미 일개의 생존체가 되어있다. 남의 이름을 제 맘대로 사용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묵시할 수없다’하는 항의에 대하야 라디오 회사측이 질랴고 할 까닭이 없다’(‘말 못하는 미키, 상표 때문에 소송’, 조선일보 1936년 6월21일)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라디오 제작사는 ‘미키 그림을 차용해선 안될지는 모르나 이름이 법률에 저촉되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디즈니씨가 등록상표와 저작권의 구별을 분간 못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미키 마우스를 둘러싼 저작권 논쟁이 조선에도 소개될 만큼 유별났다.
◇디즈니 창업 100주년
올해는 디즈니 창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디즈니는 1923년 10월16일 스물 두살 월트 디즈니가 형 로이와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라는 영화사를 개업한 날을 창사 기념일로 기념한다. 만화, 영화로 시작한 디즈니는 ‘디즈니랜드’ 놀이공원, 방송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산업 강자로 떠올랐다.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 인어공주로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년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키이우 대피소에서 일곱살짜리 아이가 부른 ‘겨울왕국’ 노래 ‘렛 잇 고’(Let it go)가 세계인의 공감과 연민을 자아낸 것처럼, 디즈니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유니버설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미키 마우스가 이 땅에 소개된 지 90여 년 만에 우리도 세계를 향해 K팝, K드라마 같은 한류를 발산하는 나라가 됐다. 격세지감, 감개무량이다.
◇참고자료
정향재, 193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속 ‘미키마우스’-캐릭터의 수용과 변화양상을 중심으로-, 일본어문학 제95집,202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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