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無知지옥] 수억원 투자했으면서 “상품 구조 몰랐다”…불완전판매에 우는 금융사 주주
여전히 투자자는 ‘은행=원금 보장’ 인식
손실 배상액은 금융사 호주머니에서 나간다
곗돈과 은행 적금이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스마트폰을 활용한 주식, 가상화폐 매매 등 투자처가 다양해졌다. 그만큼 금융 소비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정신이 바뀌지 않았다. 돈을 다루는 장사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탓에 그간 우리 사회에서 돈에 대한 얘기는 금기시됐고 금융 교육이 전무했다. 그 결과 3대 사모펀드(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및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논란, 라덕연 사태가 터졌다. 반복되는 금융 사고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어봤다. [편집자주]
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펀드 환매 중단에 이어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대규모 손실 가능성이 대두됐다. 두 사태엔 공통점이 있다. ‘상품을 모르고 가입했다’는 투자자들의 주장이다. 상품의 구조도 모르고 수억원을 투자했다니, 무슨 말일까.
사모펀드와 ELS는 모두 원금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상품이지만 투자자들은 상품 자체보다 판매처에 주목했다. 대형 은행·증권사에서 파는 상품이니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자녀의 결혼자금 또는 노후 자금을 넣은 것이다.
최규식(가명·70)씨가 그랬다. 최씨는 3년 전 은행 직원의 추천을 받아 홍콩H지수 ELS에 10억원을 투자했다. ELS는 기초자산이 약속한 범위를 벗어나면 최고 원금을 전액 날리는 상품이었지만 그에게 ELS는 적금이었다. 은행 직원이 ‘홍콩이 망하지 않는 한 손실 볼 일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예·적금만 해봤을 뿐 주식도, 펀드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ELS도 예적금과 비슷한 상품이겠거니 한 게 화가 됐다. 현재는 투자금 대부분이 손실인 상태다. 최씨는 “나라에서 제일 큰 은행에서 추천하길래 샀다”며 “돈을 더 벌고 싶었으면 은행이 아닌 증권사를 찾았을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최씨는 15일 부산에서 비바람을 뚫고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ELS 투자자 시위에서 “불완전판매 해놓고 책임 회피 웬 말이냐”고 외쳤다. 이날 시위엔 최씨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 30여명이 모였다.
금융투자상품에 투자했다가 원금을 잃고 금감원 앞에서 불완전판매를 주장하는 건 홍콩H지수 ELS 투자자가 처음이 아니다. 2019년 사모펀드 사태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라임자산운용은 부실한 코스닥 기업의 전환사채(CB)에 투자한 뒤 돌려막기를 했고, 옵티머스자산운용은 안전한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투자한다면서 투자자를 모은 후 실제로는 부실 채권에 투자했다. 디스커버리자산운용은 펀드 편입 자산에서 채무불이행(디폴트)이 나면서 환매 중단을 선언했다. 시중은행 중에서 라임 펀드는 우리은행, 옵티머스 펀드와 디스커버리 펀드는 IBK기업은행에서 많이 팔렸다.
수조원 규모로 팔린 사모펀드가 환매 중단을 선언하자 투자자들은 사기피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직적 행동에 나섰다. 이때도 피해자들은 ‘은행에서 팔아 안전한 상품인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사모펀드는 전문성을 갖춘 전문투자자만 투자할 수 있는 펀드로 최소 가입 금액은 1억원이다. 펀드의 특성상 원금 보장은 당연히 안 된다. 하지만 문제가 된 사모펀드 투자자들은 금감원은 물론 판매사 앞에서도 “투자금 100%를 반환하라”며 시위에 나섰다.
실제로도 불완전판매가 적지는 않았던 걸로 보이지만,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이 훼손돼선 안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은행이라고 예·적금만 판매하는 건 아니다. 은행에서 펀드 판매가 허용된 건 1998년이며,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ELS 판매가 시작된 것 또한 2003년이다. 20년 넘게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상품을 팔아왔는데, 이제 와 ‘은행=안전’의 공식을 내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사모펀드 투자자를 피해자로 규정하면서 자기책임 원칙을 허물었다. 금감원은 라임 펀드 중 무역금융에 투자한 펀드(2018년 11월 이후 판매분)·옵티머스·헤리티지 펀드에 대해 판매사가 투자자에게 투자 원금을 전액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투자 계약 자체가 무효라는 뜻이다.
이 외에도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는 라임 국내펀드와 CI펀드를 판 BNK경남은행에 최고 70%를, 이탈리아 헬스케어 펀드를 판 하나은행과 라임 국내펀드를 판 대신증권에 최고 80%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펀드 판매사로서 투자자 보호 노력을 소홀히 했다는 게 명분이었다.
이에 따른 책임은 결국 판매사(은행·증권사)와 그 주주가 지게 됐다. 배상 재원이 판매사의 고유 자금이기 때문이다. 하준경 한양대학교 교수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매사 직원이 투자자에게 어떤 설명을 했는지가 불완전판매 판단의 핵심이지만 (은행과 증권사에서 판매된 금융 상품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 즉 주주 등이 부담한다”며 “금융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순 있어도 계속 비슷한 구조로 사태가 반복되는 것은 문제”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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