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한류]① 美 워싱턴 첫 한국계 女 검사장 “사회적 약자 괴롭히는 임금 착취 해결할 것”
한국인 어머니,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당선, 한인 커뮤니티 도움 덕분...감동 받았다”
경제 범죄·임금 착취 전담하는 부서 신설
“임금 착취는 소수자에 충격 주는 ‘조용한 전염병’”
지난해 한국 법조계에 선물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미국 워싱턴 최대 카운티의 검사장 선거에서 역사상 처음 당선된 여성 소수인종 검사장이 한국계라는 것. 지역주민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미국의 선출직 검사장은 소수인종, 특히 아시아인들에겐 문이 좁기로 유명하다. 한국계는 현재 단 2명뿐이지만 향후 더 많은 이들이 요직에 오를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2024년 새해를 맞아 해외에서 어려움을 딛고 활약 중인 한인 법조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작년 11월 8일(현지시각), 미국 시애틀과 커클랜드 등을 포괄하는 워싱턴 최대 카운티 230만 인구의 ‘킹 카운티’에서 사상 첫 유색인종 여성 검사장이 탄생했다. 리사 매니언(Leesa manion) 검사장은 1978년 이후 44년 만에 열린 검사장 선거에서 무려 58%의 득표율로 경쟁자를 10%포인트 이상 따돌렸다. 그가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외부인이 아니라 전임 검사장의 참모로 15년을 지역사회를 위해 묵묵히 일한 인물이란 사실도 주민들로 하여금 그녀의 승리에 박수를 보내게 했다.
현지 언론이 주로 그녀의 인종과 성별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녀가 한국계란 사실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는 현재 미국에 단 2명뿐인 한국계 선출직 검사장이다. 미국 검찰은 연방 검찰, 주 검찰, 지역 검찰로 나뉜다. 이중 연방 검사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주 검사장과 지방 검사장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선거로 뽑는다. 한국계는 지난 2011년 미네소타주 램지 카운티에서 당선돼 연임한 존 최 검사장과 매니언 검사장 2명이 재직 중이다.
매니언 검사장은 1960년대 서울에서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백인 아버지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뚜렷하게 갖지 못한 채 자라났다. 할머니가 백인이 아니고 영어도 서툰 그녀의 어머니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집에서 내쫓아 25년동안 떨어져 살았기 때문이다. 매니언 검사장은 백인이 대부분인 켄터키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한국어는 물론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본인을 ‘대한민국 아줌마’라고 소개한다. 매니언 검사장은 취임 후 한국 언론과 첫 공식 인터뷰를 조선비즈와 갖고 작년 검사장 선거에서 단지 같은 뿌리를 공유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열렬하게 지지해준 한인 사회의 정에 큰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당선된 후 사무실로 들어가던 중 우연히 만난 한국인 사업가가 두 주먹을 서로 맞대면서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말한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매니언 검사장은 직원 600명, 연간 예산 8000만달러(1037억원)에 달하는 킹 카운티 검찰의 새로운 수장으로서 숨가쁜 1년을 보냈다. 취임 후 성 기반 폭력 및 예방 부서(Gender Based Violence and Prevention Divison·GBVP)와 경제 범죄 및 임금 착취 부서(Economic Crimes and Wage Theft Division·ECWT)를 만들었다. 인종, 성 차별에서 비롯된 증오 범죄(hate crime)를 해결하고 조직적인 소매업 도둑질(Organized retail theft)과 임금 착취를 뿌리 뽑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 15년 간 킹 카운티 검찰 재직… “당선 일등공신은 한인 커뮤니티”
매니언 검사장은 1996년 시애틀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뒤 검사로 재직했고 그중 15년을 킹 카운티 검찰에서 일했다. 2007년 검사장 비서실장(chief of staff)으로 발탁 돼 킹 카운티 검찰 2인자로 부상했다.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증오 범죄를 막고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전담 부서장, 직원을 채용하는 데 힘을 보탰다. 동시에 경범죄를 저지른 어른들과 청소년은 지역사회가 개입해 행동과 의사결정 개선에 도움을 주는 전환 프로그램(diversion program) 도입을 추진했다.
그가 검사장 선거에 뛰어든 것은 작년 초 상사인 댄 새터버그 전 검사장이 다섯번째 연임을 하지 않겠다고 공식화 하면서다. 킹 카운티 검찰은 4년 임기인 검사장을 선거로 뽑는데 연임에 제한이 없다. 그는 “정치인이 될 생각도, 선거 현수막에서 내 이름을 보고 싶었던 적도 없다”며 “하지만 킹 카운티 검찰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선되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법조 인생 전부를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사회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데 바쳤다”며 “킹 카운티 검찰에 재직하면서 우리 사법 시스템을 더 공정하고 범죄 피해자들을 더 위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간 것, 그리고 법 집행기관과 지역사회 비영리기관, 각종 서비스 제공자들과 관계를 맺어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선거 승리의 숨은 일등공신은 한인 커뮤니티였다. 당시 경쟁자이자 2014년부터 현역 시장으로 재직 중인 짐 페럴 페더럴웨이 시장에 비해 인지도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에게 한인들은 조건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매니언 검사장은 “한국 TV, 라디오, 뉴스 등 미디어들은 나와 인터뷰를 하고 내 배경과 경력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고 선거자금 모금 행사, 후보자 토론회를 열고 뉴스를 공유해줬다”며 “한인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 “임금 착취, 소수자에 충격 주는 조용한 전염병” 전담 부서 신설
매니언 검사장은 취임 후 미국에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조직적인 소매업 도둑질(Organized retail theft)’을 뿌리 뽑기 위한 조직 개편을 했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조직이 물건을 내다 팔 목적으로 소매업체에서 대량으로 도둑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킹 카운티 검찰에 올해 초 새로 생긴 경제 범죄 및 임금 착취 전담 부서(ECWT)에서 이런 사건을 전담한다. 그는 “취임 전 지역 사업가들에게 이런 도둑질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들었다”며 “기업 규모에 상관없이 충격을 주는 범죄이지만, 작은 기업들은 도둑질과 제품 손실이 계속되면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없기 때문에 문을 닫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CWT에서 다루는 또 다른 주요 범죄는 임금 착취다. 매니언 검사장은 이 문제를 ‘여성, 유색인종, 이주민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조용한 전염병(silent epidemic)’이라고 본다. 그는 “임금 착취는 사업주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공정임금에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일하도록 근로자를 속이거나 강요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공정임금을 주지 않는 행위”라며 “그런데도 실제보다 적게 신고되고 거의 기소되지 않아왔다”고 말했다.
매니언 검사장은 ECWT와 함께 성 기반 폭력·예방 부서(GBVP)도 만들었다. 가정폭력, 아동과 성인에 대한 성범죄, 증오 범죄 등을 다룬다. 이처럼 지역사회의 취약계층을 노린 범죄를 뿌리 뽑겠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이는 사회적인 요구가 증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수인종으로서의 어려움을 본인이 직접 피부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4살 때 그녀의 할머니가 아버지와의 결혼을 반대해 어머니를 집에서 내쫓은 기억을 언급하면서 “우리 사회가 언어 장벽이 있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소외시키는지 잘 안다”며 “삶의 경험을 통해 ‘예스, 앤드(yes, and·그래 그리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비판을 받았을 때 상대방의 의견을 부정하기보다(No, but) 존중하고 생각을 확장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킹 카운티에서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사건 적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화두로 떠올랐다. 살인, 가정폭력, 성범죄 등 중범죄가 늘어나는 가운데, 워싱턴 연방 대법원이 공중 보건 규정에 따라 문을 닫거나 업무량을 줄이며 사건 적체가 심화됐다. 그는 “추가 인력을 채용할 자금을 확보했고, 공공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 비폭력적인 사건은 기각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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