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구한말, 와인이 상륙하다
[서울=뉴시스] 포도가 귀했던 조선에서는 자연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머루를 사용해 쌀 누룩법으로 쌀 머루주를 빚었다. 하지만 머루는 포도에 비해 씨알이 작고 신맛이 강한데다 재배하기가 쉽지 않아 술을 양조하는 데 제한이 많았다.
쌀 포도주나 쌀 머루주는 쌀과 누룩이 주 원료였고, 포도나 머루는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향약집성방’의 레시피를 보면 쌀, 누룩, 포도의 비율이 각각 40㎏, 3㎏, 3㎏이다. ‘수운잡방’은 64㎏, 8㎏, 8kg이다. 대략 8:1:1의 비율이다. 포도나 머루를 첨가한 쌀 막걸리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적합하다. 수운잡방의 양조법을 변형해 현대에 비슷하게 재현한 포도주의 색을 보면, 지금의 로제 와인과 비슷한 분홍색이다. 알코올 함량은 9.2~11.2%이다.
동아시아에서 자생하는 야생포도의 품종은 30종이나 된다. 중국, 한국, 일본의 품종도 모두 다르다.
산포도로도 불리는 야생포도는 기원전 9세기에 쓰인 ‘시경’(詩經)에 처음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머루다. 머루는 ‘욱’(薁)(시경, 빈풍(豳風), 7월) 또는 포도덩굴을 뜻하는 ‘갈류’(葛藟)’(시경, 國風, 王風)로 표현했다. 한대 ‘설문해자’(說文解字), 당대 손면(孫愐)의 ‘당운’(唐韻)에서는 욱(薁)이 ‘영욱’(蘡薁)과 같다고 했다. 삼국시대 장읍(張揖)의 ‘광아’(廣雅)에서는 ‘연욱’(燕薁)이라고 했고, 당나라 ‘신수본초’(新修本草)에서는 산포도, 명대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는 야포도(野葡萄)라고 했다. 포도와 비슷한데 열매가 작고 듬성듬성하게 열리며 야생에서 자란다고 설명했다. 산포도는 그 외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본초강목’에서는 포도와 별도의 항목으로 영욱을 소개했다. 맛은 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때 ‘청산별곡’에서 ‘멀위’로 처음 등장한다.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대부분 산포도로 표기돼 있다. 한 사극 드라마에선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머루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후삼국시대에 머루주를 제대로 빚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구한말 개화기가 되자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와인이 들어온다. 서양 선교사나 외교관, 사업가, 일본인들이 들여왔다.
1831년 교황청은 조선을 중국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독립교구로 설정했다. 이에 1936년(헌종 2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사제 3명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 순교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프랑스 신부들은 한국에 들어왔고, 그중에는 1866년 순교한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 주교도 있었다. 프랑스 사제들은 선교하는 나라에 미사용 와인과 양조용 포도나무를 반입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베르뇌 주교의 서한집’(2018, 상권)에는 1861년(철종 12년) 선교회 홍콩 극동대표부 리부아 신부가 베르뇌 주교의 요청으로 와인과 브랜디를 한국에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프로이센 상인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1832~1903)도 1868년 우리나라에 와인을 가져왔다. 1886년 출판된 그의 책에서 ‘한국 사람은 레드 와인이 떫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적었다(‘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집문당, 2000).
1873년 대원군이 하야하고, 1876년(고종13)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각국과 잇달아 통상조약을 맺었다. 1882년 청나라와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현격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모든 수입물품에는 관세 5%를 부과했다. 서양과는 1882년 미국과 영국, 1883년 독일, 1884년 러시아와 이탈리아, 1886년 프랑스, 1901년 벨기에, 1902년 덴마크와 상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한문과 상대국 언어로 된 조약 내용은 대부분 같고, 전문 13조 혹은 14조와 세칙(稅則) 등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와 체결한 조불수호통상조약에만 선교를 묵시적으로 허용하는 조항이 추가로 들어갔다. 세칙은 수입품인 진구화(進口貨)와 수출품인 출구화(出口貨)로 나눈 후, 수입은 다시 면세 1등급부터 6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명시했다. 수입품엔 와인도 있었다. 와인의 수입관세는 3등급에 속했고 병이나 오크통에 관계없이 물품가격의 7.5%를 부과했다. 그 외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도 동일한 세율을 적용했다. 1883년 체결한 조일통상장정 해관세칙의 와인 관세율은 조금 높아 10%를 부과했다(한성순보, 1883.12.20). 수입관세 15% 및 각종 세금을 포함해 70%에 달하는 현재의 와인 세율과 비교가 된다.
1883년 개항한 인천 제물포는 와인의 수입과 소비에 있어 최전방 기지였다.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라서 외국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한때는 청나라 상인들이 득세했지만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1895년 이후에는 일본 상인들에 의해 밀려난다. 이곳에 서구식 호텔도 처음 생겼다. 1887년 일본인 호리 큐타로(堀久太郞) 부자가 우리나라 최초 호텔인 대불호텔을 열었다. 1897년 현재 서울에는 4개의 외국대표부와 3개의 영사관이 있었고, 200여명의 서양인들이 거주했다(독립신문 영문판 The independent, 1897.1.26.).
1890년대 초 서울 진고개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큰 수입상이 들어서고 왕실에도 물품을 공급했다(하재일기(荷齋日記), 1892~1894, 池圭植). 1897년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 수가 1620명에 달했다(The independent, 1897.1.16.).
1899년에는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33.2㎞ 길이의 철도가 개통됐다. 시속 20㎞ 남짓으로 1시간40분이나 걸렸지만, 길이 뚫리자 서울에도 호텔이 생겼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에는 황궁 구내에 서울호텔 하나만 있었지만, 1901년에는 프랑스인이 운영한 팔레호텔, 1902년에는 손탁호텔, 1914년에는 조선호텔이 생겼다. 호텔의 레스토랑과 바에서는 와인을 서빙했다. 독일인 앙투아네트 손탁은 호텔을 경영하면서 1909년까지 궁내부 소속으로 왕실과 외빈에게 서양요리와 와인, 커피를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외국인이 참석하는 각종 연회 및 외교행사에는 와인이 등장했고, 왕실을 비롯하여 고관들은 와인을 마셨다. 나라는 기울어 가도 왕과 고관들은 와인을 즐겼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은 연재를 종료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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