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구 “새해엔 달라질 줄 알았는데…TBS와 함께 침몰할 결심”
‘최저시급 방송’ 올해까지 하겠다 했지만
“6년 함께했는데 딱 끊는 게 못할 짓”
“5월에 폐국? 사회적 논의라도 하자“
2023년이 저문다. 지배권력이 장악에만 열을 올리고 역사는 퇴행시켰던 대한민국의 1년은 사실상 삭풍만 몰아치는 한겨울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뜨거운 분노와 따뜻한 연대를 보이며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 외치고 힘없는 이에겐 손을 내밀었다. 2023년의 끝에도 또 한해를 살아갈 용기를 내는 이유다. 한겨레 토요판이 커버스토리 보도 이후를 되짚으며 2024년 다시 희망을 얘기하려 한다.
95.1M㎐, 티비에스(TBS) 라디오를 통해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청취자를 만나온 최일구 앵커. 그는 지난 주말과 성탄절을 고뇌하며 보냈다. 6년째 진행해온 ‘허리케인 라디오’를 2024년 1월 중순엔 그만두겠다고 방송사에 통보했지만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사흘 동안 성탄 연휴를 보내고 26일 출근한 그는 제작진에게 “나, 티비에스와 함께 침몰할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최 앵커는 지난 27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티비에스가 해산하는 5월31일까지 방송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내가 움직이는 것 자체가 손해잖아요. 독립투사도 아니고 생활인인데, 시간당 1만원도 안 되는 출연료 받고 계속 버틸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올해까지만 하고 끝내겠다고 했더니 방송사에서 ‘시간을 좀 갖자’고 사정해, 그러면 딱 1월 중순까지만 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연휴 동안 별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참 못 할 짓이더라고요. 그동안 6년을 함께 방송했는데 딱 끝내는 게 의리 없어 보이기도 하고, 내가 세상과 단절될 것 같은 생각도 들고…. 결국 생각을 바꿔 먹었어요. 어차피 티비에스에 남은 시간이 딱 다섯달이라는 데 그냥 시간당 1만원을 주든 말든 이 타이태닉과 남은 운명을 함께하자고 결심했죠.”
최 앵커는 티비에스 라디오에 남은 유일한 외부 진행자다. 국민의힘이 다수를 장악한 서울시의회가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 몇몇 프로그램의 편파성을 빌미 삼아 지난해보다 88억원 줄어든 232억원의 올해 예산을 편성하면서 많은 이들이 떠났다. 354명 직원 인건비 수준에 불과한 예산으로는 외부 진행자 출연료, 방송 제작비 등을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 앵커는 최저시급 9620원을 받으며 자리를 지켰다. 그의 말처럼 매일 경기도 일산 집과 서울 상암동 방송사를 오갈수록 적자 인생이다. 그런데 의리와 뚝심, 무엇보다 2024년 새해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버텼다.
그러나 기다림은 실망으로 끝났다. 서울시의회는 지난 22일 ‘5개월 지원 연장 조례’와 함께 새해 5월31일까지 직원 급여, 조기퇴직급여, 청사유지비 등의 명목으로 93억원의 출연금 예산을 승인했다. 더는 출연금 지급은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연간 400억원의 예산 중 70%를 서울시 출연금에 의존해온 티비에스는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서울시 의회가 예산을 준다고 해서 옛날처럼은 아니더라도 제작비 등이 어느 정도 복구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작비가 0원이래요. 그것도 5월31일까지 티비에스를 정리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라네요. 7월에 (한겨레) 인터뷰할 때는 티비에스가 어디로 항해할지 몰랐는데 이젠 방향이 확실히 나온 거죠. ‘침몰할 결심’을 한 것으로…. 다섯달 뒤엔 확실히 해산하는 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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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1일 최 앵커와 인터뷰 이후 티비에스는 근근이 버텼다. 경영진이 교체되고 희망퇴직도 받았다. 50여명이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현재 남은 직원은 300명이 안 된다. 제작 공백을 남아 있는 프로듀서와 소속 아나운서가 강도 높은 노동으로 메웠다. 최 앵커뿐 아니라 많은 출연자가 티비에스 정상화를 기대하며 재능기부로 힘을 보탰다. 싱글벙글쇼 하차 이후 3년3개월 만에 완전체 방송을 한 강석·김혜영씨를 비롯해 김성환·조영구·박철씨 등 유명인들이 일주일씩 매일 12시부터 2시까지 ‘9595쇼―힘내세요 여러분!’을 진행했다. ‘허리케인 라디오’ 속 코너인 ‘인생 10곡 추천’엔 가수 홍서범씨, 작곡가 박성훈씨, 작사가 김순곤씨 등이 출연했다. “출연자가 커피·도넛을 사 왔어요. (출연료로) 9000원 받고 출연하면서 손해를 감수한 거죠. 그래도 티비에스 어려운 걸 다 아니까 옛정, 의리로 방송에 나온 거죠.”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9595쇼’ 재능기부는 두달 만에 중단됐다. 지금은 강지연·이민준 아나운서가 전담한다. “안타깝고 안쓰럽죠.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일한 수백명의 생활인, 공무원도 민간기업 직원도 아닌 이들을 졸지에 낭인으로 만들면 어쩌자는 거죠? 상업광고도 금지돼 서울시 지원금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구조인데 광고를 허용하든 자립 근거를 마련해줘야지, 그냥 독립하라면서 의족만 떼어내면 어떻게 걸을 수 있겠냐고요. 청취자가 있는데, 95.1M㎐ 국민 자산인 공중파를 그냥 날려버리겠다는 건가요? 이건 아니지 않나요? 최소한 티비에스 운명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봐요. 논의하고 결정해야죠.”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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