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엮어라, 아니면 말고! 정치 테마주 요지경
4월 총선을 100여 일 앞둔 정치의 계절, 어김없이 후끈 달아오르는 시장이 있다. 바로 주식시장 작전 세력의 정치 투기 광풍인 정치 테마주(株)다.
정치 테마주는 유력 정치인과 혈연·학연·지연·혼맥 등으로 얽혀 있다고 알려졌거나, 정책 공약의 수혜가 기대되는 기업의 주식을 말한다. 한국에선 주로 정치인과 특정 기업 간 인맥 고리에 관한 ‘카더라 통신’ ‘아니면 말고’식 무리한 엮기가 주가를 롤러코스터에 태우곤 한다. 그 연결 고리가 근거 없는 것이라면? 속은 게 죄다. 증시의 유명한 격언처럼 ‘나보다 더 심한 바보’가 나타나 주식을 사주지 않으면 상승은 끝난다. 코인보다 위험하다는, 개미들의 곡소리 유발자 정치 테마주 요지경으로 들어가본다.
◇옷깃만 스쳐도 뜬다?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하며 정치에 정식 데뷔한 지난 26일. 증시에선 환호와 비명이 엇갈렸다. 소위 ‘한동훈 테마주’인 임상시험 업체 디티앤씨알오가 하루에 30% 급등하고 모회사인 디티앤씨도 28% 오른 것. 화학약품 업체 원익큐브는 이날 20% 올랐다가 다음 날엔 또 그만큼 폭락했다. 이들 기업에 실적 변수가 있던 건 아니다. 디티앤씨의 모 이사가 한 위원장과 서울법대와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동문이고, 원익큐브의 감사가 한 위원장과 같은 검찰청에 근무했다는 풍문 말고는.
이날 또 다른 한동훈 테마주들은 급락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위원장의 현대고 동창인 배우 이정재와 관련된 이른바 ‘갈비집 종목들’이다. 지난달 말 두 사람이 서초동 갈비집에서 식사해 절친이란 사실이 알려진 직후, 이씨의 연인 임세령이 부회장으로 있는 지주회사 대상홀딩스와 대상홀딩스우까지 연일 급등해 매매 정지가 될 정도였다. 갈비집 사진 한 장에 대상 등이 쓸어간 시세차익이 2900억원어치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한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정계 진출 기대감이 ‘긁은 복권’이 되자 대상은 급락세로 돌아섰고, 26일부터 두 자릿수 폭락했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최대주주인 빅데이터 기반 광고 업체 와이더플래닛도 크리스마스 전까지 656% 폭등하다가 돌연 폭락했다. 갈비집 회동에 동석한 변호사가 사외이사로 있다는 소방설비 업체 파라텍도 뜬금없이 급등했다 함께 날벼락을 맞았다. 이들이 ‘한동훈 대장주’로 위세를 떨친 건 단 2~3주뿐이다.
올해 이렇게 들썩인 한동훈 테마주는 줄잡아 20~30개. 한동훈 관련성이 확인된 기업은 없다. 죄다 ‘사외이사 혹은 감사가 학교나 연수원·사시 동기’ ‘아내 진은정 변호사와 같은 로펌에서 일한 사람이 발 걸친 회사’란 식이다.
한 위원장이 “어렸을 때 청주에 살아 사투리가 나올 수 있다”고 하자 충북에 공장이나 본사를 뒀거나 ‘청주 한씨’가 대표인 기업들이 떴다가, “총선에 불출마한다”고 하자 일제히 급락했다. 마약 사범 처벌 강화, 이민청 신설 같은 법무장관 시절 정책의 수혜를 조금이라도 볼 법한 군소 기업들도 비슷한 처지다.
앞으로 국민의힘 공천 뉴스나 여론 지지율에 따라 한동훈 관련주 리스트는 계속 업데이트될 전망이다. 검사로만 살아온 한 위원장의 옷깃만 스쳐도, 아니 옷깃이 스쳤는지조차 모를 기업을 굴비처럼 엮을 수 있는 건 한국 증시 ‘지라시’만의 놀라운 스토리텔링 덕이다.
◇정책보다 인맥株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초부터 12월 26일까지 투자경고종목으로 지정된 사례는 223건으로, 지난해(143건)보다 56% 급증했다. 경보 최고 단계인 투자위험종목은 18건이었는데 이 중 테마주가 11건이었다. 특히 11~12월 두 달간 상승률 1위 종목이 한동훈 테마주였다.
야권의 핫한 테마주는 신당 창당을 추진 중인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관련주다. 이 전 대표의 동생이 고문으로 있는 삼환기업의 계열사인 남선알미늄과 남선알미우, 서울대 동문이 대표인 부국철강과 남성, 광주제일고 동문이 대표로 있는 남화토건과 금호전기 등이 꼽힌다. 이낙연 테마주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불거질 때마다 민감하게 움직여, 두 사람이 제로섬(zero-sum)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재명 관련주는 성남시장 시절 측근이 대표로 있는 컴퓨터 업체 에이텍, 중앙대 동문이 대표인 프리엠스와 토탈소프트, 이 대표 고향인 경북 안동에 본사를 둔 동신건설 등이 꼽힌다. 지난 9월엔 조국 전 법무장관이 “비법률적 명예 회복을 추구하겠다”며 총선 출마를 시사하자, 미 UC버클리 로스쿨 동문이 감사를 지냈다는 화천기계 주가가 들썩였다.
국내 정치 테마주는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4대강 사업 공약 관련주인 이화공영 주가가 4개월 만에 25배 폭등한 것을 효시로 친다. 이어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테마주로 친노 인사가 포진한 우리들제약·바른손, 박근혜 후보의 동생 박지만이 대표인 EG와 아가방 등이 급등락하면서 큰 선거 때마다 개인 인맥에 기댄 테마주 쏠림이 뚜렷해졌다.
선진국에도 정치 테마주는 있다. 주로 양당의 정강·정책을 따르기 때문에 흐름이 예측 가능하고 투자의 명분도 뚜렷하다. 미국 선거에선 민주당 우세일 땐 친환경·의료·IT·인프라 관련주가, 공화당 우세일 땐 화석 에너지·군수·제약·금융·소비재주가 오르는 경향이 있다.
반면 한국은 ‘그 정치인을 누가 얼마나 아느냐’에 대한 입소문이 테마주를 만든다. 상관관계가 모호하고 장세 변동이 극심하다. 2020년 미 대선 당시 세계 최대 자본시장인 뉴욕 증시에서 조 바이든 후보의 신재생·친환경 에너지주가 뜰 때, 한국 증시는 바이든이 나온 시러큐스대 로스쿨에 유학한 기업인이 있는 회사를 이 잡듯 뒤져 ‘바이든 테마주’로 띄우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손실 본 99%는 개미
정치 테마주 광풍은 한국 정치가 공적 시스템보다는 친소 관계에 좌우되고, 재계와 자본시장도 그런 권력 집중형 정치 문화에 휘둘리는 현실, 즉 뿌리 깊은 관치 경제와 정경유착을 방증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길남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제적으로 한국 같은 정치 테마주 사례를 찾기 힘들고, 대부분 연구는 개발도상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개도국은 정경유착 정도가 높아 정부의 특혜나 구제금융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 테마주는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 무관한 투기 종목이란 것을 모두가 안다. 그러나 워낙 급격히 오르기 때문에 단타 매매로 차익을 보려는 투기 세력이 몰린다.
지난달 사외이사가 한동훈과 대학 동문이란 이유로 급등한 합성피혁 업체 덕성은 당국의 조사가 들어가자 “우리는 정치 테마와 무관하다”고 공시까지 냈는데도 개미들은 매수를 계속했다. 뜬소문이더라도 치고 빠지기만 잘하면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고금리·고물가 장기화로 침체를 벗어날 경제 호재가 없는 상황에서 정치 이벤트가 시중 눈먼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치 테마주는 거품처럼 꺼진다. 해당 정치인의 당락과 관계없이, 소문의 재료가 소진되는 선거 직전 주가가 급락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지난 대선에서도 ‘윤석열주’ ‘이재명주’ 모두 선거일 즈음 고점 대비 70~80% 폭락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2년 대선 테마주 35개 종목에 투자한 계좌 중 195만개에서 총 1조5494억원의 손실이 발생했으며, 손실을 본 투자자의 99%는 개인이었다. 정보를 쥔 기업 대주주나 소수 작전세력만 과실을 땄을 뿐, 개미들은 어디에 베팅했든 쓴잔을 들이켰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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