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백제 佛像처럼… 별세계를 꿈꾸는 그림

김인혜 미술사가 2023. 12. 3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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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무소유 정신의 휴머니즘… 재일한국인 1세대 화가 전화황
1976년 작 '미륵보살'. 약 10년간 불상 그림에 매달려 완성한 전화황 양식의 반가 사유상이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얼마 전 재일한국인 학자 서경식의 작고 소식을 접하고, 그의 저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다시 꺼내 읽었다. 30년 전 대학가 베스트셀러였던 책. 다시 보니 거기 실린 작품들은 미술사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설명도 극히 개인적이어서 이 책이 왜 그렇게까지 인기를 끌었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저자의 가족사가 적힌 책의 에필로그였다.

서경식의 조부는 1928년 가난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지하철 공사 인부로 일했다고 한다. 서경식의 부친은 해방 후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에 남았는데, 이후 국교가 단절되면서 일본에 정착했다. 그의 두 형은 국교 수립 후 서울대 학생이 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1971년 ‘재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각각 18년, 20년을 복역했다. 한국을 오가며 옥바라지하던 부모는 출옥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고.

그런 상황이었으니, 유럽 여행을 갔던 서경식이 성화(聖畫)를 보더라도 유독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묘사에 더 눈길이 갔을 이유가 이해됐다. 그는 예쁜 그림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었다. 미술사적 의미는 더구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지극히 어둡고 처절한 현실 속에서도 구원의 빛을 던져주는 미술품에 마음이 갔다. 그에게 그림은 얼마나 절실한가, 간절한가 하는 질문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이른바 ‘재일 한국인’의 삶은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식민 치하, 가난, 조국 분단의 현실을 체감하면서 이들을 평생 지탱한 마음가짐은 어쩌면 ‘간절함’이었다. 그런 간절함으로 가득한 그림을 그렸던 재일 한국인 1세대 화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이름은 전화황(1909~1996)이다.

1951년 작 '군상'. 6·25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그린 대작이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전화황(본명 전봉제)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이다. 잡화점을 운영했던 평범한 가정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전봉초(1919~2002)는 조선인 1세대 첼리스트로, 해방 후 서울대 음대 교수를 오래 지낸 인물이다. 전봉초가 처음 바이올린을 배운 것도 전화황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친구 김동진(가곡 ‘가고파’의 작곡가)에게 동생의 음악 공부를 부탁했던 것이 그였다. 전화황 자신은 클라리넷과 하모니카를 연주했고, 시를 써서 신문에 발표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던 타고난 재주꾼이었다. 나중에 전쟁 중 부산 다방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시인 전봉래, 그의 동생 전봉건도 모두 전화황의 사촌으로 이래저래 예술가가 많이 나온 집안이었다.

전화황은 평양에서 중등학교를 다니면서 삭성회화연구소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그림 동요’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로 통하는 전봉제가 전화황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를 정도로, 초창기 그는 ‘어린이 그림’ 전문가로 맹활약했다. 타고난 재주로 먹고살면 그만이라 생각하면 참 쉬웠을 텐데, 전화황은 세상의 온갖 근본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지닌 책을 일본 경찰에게 검열당해 빼앗긴 후 돌려받기는커녕 부모님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식민 치하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가로이 그림을 그리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세계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저서를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그리고 일본 사상가 니시다 덴코의 ‘무소유’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인간의 생활에는 오로지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으로, 하나는 일체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사는 것,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전화황은 후자의 삶을 살겠다는 일념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걸어서 탁발(托鉢)했다. 그리고 만주의 봉천(奉天)에서 니시다를 만나 그가 이끄는 ‘일등원(一燈園)’ 일원이 돼 교토로 건너갔다. 1938년의 일이었다.

1969년 작 '자화상'.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참회하는 삶

일등원은 속세의 죄악과 고뇌를 벗어나고자 깊이 참회하는 것을 기본 정신으로 삼은 단체였다. 신앙의 대상은 없었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아 합장하고 경전을 읽었다. 사회를 위해 무보수로 봉사하는 삶을 추구했던 일등원의 공동 생활은 말 그대로 ‘하나의 등불’이 돼 전화황의 삶을 비췄다.

하지만 점차 그에게서 미술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났다. 그는 니시다의 권유도 있고 해서 1943년부터는 서서히 다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교토 화단의 중심 인물이었던 스다 구니타로의 그림에 깊은 감화를 받아 그의 제자가 됐다. 스다 또한 거의 검정에 가까운 매우 어두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그 사이 한국은 해방됐고 6·25 전쟁을 겪었다. 북한의 고향에서는 전쟁으로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동생 중 한 명은 부역에 동원돼 과로로 사망했다. 동생 전봉초는 그나마 남한으로 피란을 가 간신히 생존했지만 서로 만날 수도 없었다. 전화황은 비참한 가족의 소식을 접하며 동족상잔 비극을 여러 점 그림으로 남겼다. 이 시기 그의 그림은 말할 수 없이 암담했다. 암흑 속에서 간신히 조그마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종류의 그림들이었다.

◇10년간 몰두한 불상 그림

그러던 어느 날 전화황은 오사카의 한 수집가에게서 불상을 하나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그는 원래 종교가 없었으나, 불상이 주는 묘한 매력에는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나라 호류지 ‘백제관음’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는 매일 호류지를 다니며 종일 죽치고 앉아 관음상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불상을 보고 또 보는 오랜 과정 끝에, 의뢰받은 지 1년 만에 겨우 한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1964년 작 ‘백제관음’이었다. 얼굴이 거의 무너져내려 이목구비를 또렷이 구별할 수도 없는 관음상. 그렇게 잘 보이지도 않는 보살을 그린 이유는 화가가 처음부터 ‘눈에 보이는’ 관음상을 그리려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화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즉 관음보살이 풍기는 영원하고 신비한 에너지 자체를 화면에 담기 위해 골몰하고 골몰했다.

1964년 작 '백제 관음'. 일본 호류지에 소장된 일명 '백제 관음'을 실제 크기로 그린 역작이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전화황이 스스로 불상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데까지는 그 후로도 장장 10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그는 ‘백제관음’ 이후 교토 고류지의 ‘목조 반가 사유상’에 꽂혔다. 한국의 국보 83호 반가 사유상과 닮은꼴로 유명한 불상이다. 그의 ‘미륵보살’에서도 강조된 것은, 화면 전체에 감도는 은은한 빛과 아스라한 공기 자체다. 옆모습을 한 보살의 섬세한 윤곽선은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전화황의 그림은 예술의 차원 그 이상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사물의 이미지를 시각화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어떤 비의(祕義)를 감지하는 수단으로 그림을 활용했을 뿐이다. 한 일본인 평론가(미치아키 가와키타)는 이렇게 평했다. “전화황의 그림 외의 작품이 만약 그림이라 한다면, 전씨의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전씨는 그림을 그리려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인지 별세계에의 통로를 실현하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화황은 스스로 가난하기 그지없었지만, 언제나 더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약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휴머니스트였다. 언젠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는데, 이 기회에 세계 유네스코에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를 위한 모금 운동을 촉발하고자 10만명 서명을 받기 위해 일본 전역을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의 세계관은 뭔가 차원이 달랐다.

1968년 작 '두 개의 태양'. 백두산 천지에는 태양이 하나만 비쳐 있는데,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다. 분단으로 나뉜 조국을 상징한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모든 것을 주는 삶

전화황의 그림에서 “별세계에의 통로”를 감지한 이가 또 있었다. 하정웅이라는 재일 한국인 2세 사업가였다. 그는 1973년 도쿄 한 화랑에서 전화황의 ‘미륵보살’을 처음 보고 충격에 빠졌다. 화가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직접 그의 교토 집을 찾아갔다가, 비가 줄줄 새 집안이 온통 물바다인 와중에 그림이 다 젖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집 안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가난한 화가를 보면서, 하정웅은 그를 돕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처음 전화황의 작품을 구입한 것을 시작으로, 훗날 저명한 미술 컬렉터가 되는 첫발을 내디뎠다.

하정웅 또한 이주노동자의 아들이었다. 전남 영암 출신 부모는 센다이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 노동자였다. 어머니는 재일한국인이 생계를 위해 많이 했던 쌀 암거래상으로 자녀를 양육했다. 찢어지게 가난해 학업을 제대로 이을 수도 없었던 하정웅은 1970년대 전자 도매 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건강상 문제가 찾아왔을 때 대면한 전화황의 ‘미륵보살’, 그것은 언제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았던 하정웅에게 마치 하나의 구원처럼 다가왔다. 하정웅은 전화황을 위해 1979년 처음으로 한국 여행을 주선했고, 1982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전시로 전화황의 이름이 한국 사회에 처음 알려졌다. 또한 하정웅은 평생 모은 자신의 컬렉션을 한국의 공공 미술관에 기증하기 시작했는데, 전화황 작품은 모두 119점이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됐다.

재일 한국인 1세대 전화황, 2세대 하정웅, 3세대 서경식. 이들을 위해 조국과 사회가 대체 무슨 일을 해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들은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인간의 삶을 이끄는 두 길 중에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또 나누는 길을 걷기로. 이들을 그런 길로 인도한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간절함’이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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