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타하리’는 진짜 간첩이었을까, 양다리 불륜녀였을까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김수임과 이강국의
미스터리 러브스토리
‘여간첩’ 김수임과 ‘공산당 2인자’ 이강국의 38선을 넘나든 ‘간첩 행위’와 러브 스토리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자주 극화된 소재 가운데 하나다. 영화 ‘나는 속았다’(1964, 문정숙·신영균),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1974, 윤소라·신일룡), TBC 드라마 ‘운명’(1974, 지윤성·김세윤), MBC ‘제1공화국: 여간첩 김수임’(1981, 정애리·현석), SBS ‘서울 1945′(2006, 한다감·류수영)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남과 북에서 각각 간첩죄로 사형된 ‘비극적 커플’의 사랑을 연기했다.
1955년 북한에서 ‘미 제국주의 간첩’ 혐의로 처형된 이강국은 박헌영에 이어 남한 공산당 2인자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1906년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보성고보를 학업 우수 장학생인 ‘면비생’으로 졸업한 이강국은 경성제대 법학부 2기로 입학했다. 경성제대 ‘적색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우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졸업 후에는 처남 조준호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독일 베를린대학에 유학했다.
이강국보다 세 살 많은 처남 조준호는 동아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한 명치정(明治町·지금의 명동 일대) 주식계의 제왕이었다. 동아증권은 조선인, 일본인 소유를 통틀어 명치정에서 가장 큰 증권회사였다. 명동 사보이호텔이 그의 소유였다. 이강국은 처남이 ‘주식’을 사고팔아 보내준 학비로 독일에서 공산주의를 연구하고 독일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귀국 후 동아증권 이사가 되었고, 같은 시기 원산에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지원했다. 1938년 원산에서 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년 후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전숙희의 실화소설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의하면, 김수임이 이강국을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부인’ 부탁으로 원산형무소로 그를 면회하러 갔던 이화여전 영문과 선배 모윤숙을 따라갔을 때였다. 수필가이자 파라다이스그룹 설립자의 누나인 전숙희는 이 소설 서문에서 “나는 학교 선배인 김수임의 따뜻한 인품과 순진함에 반했고 (…) 수임 언니와 나는 한때 ‘옥인동 19번지’에서 같이 살기도 했다”고 밝혔다. ‘옥인동 19번지’는 이완용이 살았던 저택으로 미 육군 24군단 헌병감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을 위해 마련해준 ‘사랑의 보금자리’였다. 수배령이 내려진 후 이강국이 5일 동안 숨어 지내던 곳이었고, 김수임이 낳은 베어드의 아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김수임은 1911년 경기도 연천 출신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11살에 민며느리로 15살 신랑에게 팔리듯 시집갔다. 신랑의 횡포로 가출한 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인 독신녀의 양녀가 되었다. 이화여전 영문과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 미국인 치과과장의 비서 겸 통역으로 일했다. 밤에는 극예술연구회 단원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다. 모윤숙, 노천명, 최정희 등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꼽히기도 했다.
해방 후 이강국은 건국준비위원회 중앙위원회 집행위원, 조선인민공화국 서기장 등에 오르며 좌익 진영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1946년 2월 찬탁·반탁으로 좌우 대립이 격렬해지자, 남한 29개 좌익 정당 및 사회단체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했다. 이강국은 사무국장으로 좌익 운동의 중추가 된 민전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해방 후 김수임은 미군정 고위 장교들의 숙소였던 반도호텔 총무과로 이직했다. 활달한 성격으로 ‘종달새’라 불리던 김수임은 ‘낙랑클럽’의 핵심 멤버였다. ‘낙랑클럽’ 회원 전숙희는 단체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미군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를테면 한미 친선을 위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죠. 클럽 멤버는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일제 시대에 외국 유학을 갔다 올 정도의 교육받은 사람들, 또 잘살고 좋은 일도 많이 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집의 부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모윤숙씨가 만들었죠. 미혼은 한 명도 없었어요. (…) 미군들의 파티가 열리면 낙랑클럽 회원들을 초대해요. 그럼 우리는 가서 같이 대화도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으레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어요.”(‘8·15의 기억’) 요컨대 ‘많이 배운’ ‘있는 집’ ‘기혼 부인들’이 미군과 어울려 춤을 추며 ‘한미 친선’을 도모하던 ‘기괴한 모임’이었다. 1946년 김수임은 미군 24군단 헌병감 베어드 대령의 ‘특별자문’으로 미군정에 고용되었고 ‘옥인동 19번지’ 저택에서 베어드 대령과 동거에 들어갔다.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좌익 진영이 미군정을 상대로 반정부 투쟁을 노골화하자 1946년 9월 미군정은 박헌영, 이강국, 이주하 등 3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군정 경찰은 물론 미군 헌병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이주하는 이틀 만에 체포되었지만, 박헌영과 이강국은 요란스러운 수색을 비웃듯 월북했다. 박헌영은 영구차를 동원해 38선 접경지역의 어느 선산에 매장하러 가는 듯 장례 행렬로 위장해 탈출했다고 알려졌다. 미군 헌병대가 이강국을 찾아 서울 시내를 수색하는 동안, 그는 ‘옥인동 19번지’ 미군 헌병감 저택에 숨어 있었다.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에게 “개성에 있는 엄마가 아프다”며 의사를 데리고 개성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베어드는 김수임에게 미군 지프차를 내주었고, 이강국은 의사로 변장한 채 그 차를 타고 개성으로 가서 유유히 월북했다.
1950년 공안 당국은 김수임이 베어드를 통해 미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북에 있는 이강국에게 넘긴다는 ‘간첩 혐의’를 인지했다. 미군 헌병감 저택에서 체포하기 부담스러워 김수임을 모윤숙의 집으로 유인해 체포했다. 김수임은 6·25 발발 10여 일 전인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이적행위죄에 해당하는 19가지 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장 김백일 대령은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간첩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1953년 북한에서 이강국은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 인사들과 함께 ‘미 제국주의 간첩’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서도 김수임을 매개로 한 베어드 헌병감과의 ‘내통’이 주요 혐의로 다뤄졌다.
‘한국의 마타하리’로 부르기엔 김수임은 간첩 행위로 얻은 것이 너무 없었다. 김수임의 사형 집행 후 베어드 대령은 3개월에 걸쳐 수사를 받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대단한 음모가 배후에 있는 ‘이중간첩 사건’이라기보다는 한 여성을 가운데 두고 국적과 이념이 다른 두 기혼 남성이 저지른 불륜이 우연히 남과 북에서 간첩 사건으로 확대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참고 문헌>
문제안 외, ‘8·15의 기억’, 한길사, 2005
심지연, ‘이강국 연구’, 백산서당, 2006
이완범, ‘이강국과 김수임’, 본질과 현상, 2006
전갑생, ‘김수임, 마타하리에서 비운의 여인으로’, 민족21, 2021.4
전갑생, ‘비운의 신여성 김수임, 반공이데올로기의 희생양’, 민족21, 2021.5
전숙희,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정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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