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시작과 끝에 죽음을 이야기하자
[오지윤의 리빙뽀인뜨] 죽음
김영민 서울대 교수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죽음이 늘 곁에 있음을 인지할 때, 삶이 더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죽음을 생각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한 해가 다시 시작되는 지금에라도 죽음을 이야기하자. 어지간히 도톰한 눈이 내리고 하늘은 흐리다. 죽음과 친해지기 좋은 날씨다.
외할머니는 올 한 해를 요양원에서 보내셨다. 12월 초에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고,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세상을 떠나셨다. 가족들은 마지막 3주 동안 매일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의 몸은 느리지만 꾸준히 죽음에 가까워져 갔다. 곡기를 끊던 날. 그럼에도 우리를 보고 미소 짓던 날. 호스피스로 이동하던 날. 눈이 노랗게 변해버린 날. 손발이 붓기 시작한 날. 오줌이 짙은 갈색이 된 날. 마지막으로 찬송가를 따라 부른 날. 의식이 없어진 날. 체인스톡 호흡을 시작한 날. 할머니와 가졌던 3주간의 이별은 이런 식으로 요약될 수도 있겠다.
삶과 죽음 사이를 팽팽히 버티던 할머니의 존재를 가감없이 목격한 날들. 그녀와 함께한 그 어떤 시간보다도,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이 굵직한 사건처럼 여겨졌다. 누구나 100%의 확률로 이 순간에 놓일 것이란 괴팍한 명제까지, 수도 없이 받아 적은 시간이었다.
도처에 널린 죽음을 볼 때마다 미래의 나를 본다. 억울한 죽음과 황망한 죽음과 병들고 외로운 죽음과 어린 죽음까지. 지금까지는 운 좋게 피했으나 결국 도달할 죽음. 모르는 죽음이라도, 익명의 죽음이라도 애도해야 하는 이유다. 믿기 힘든 죽음들이 매일 새로운 뉴스가 되어 날아든다. 압축된 몇 문장과 이미지 뒤에 숨겨진 고통을 헤아리려는 잠깐의 노력은 나의 미래를 향해 미리 던지는 애도이다.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도록’이라는 말로 어떤 행동이든 시작하는 편이다.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죽음 앞에 알몸으로 서면 진실이 뿜어져 나온다”고, 나의 책 ‘작고 기특한 불행’에도 썼다. 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 몸을 이루는 대부분의 원소가 우주를 이루는 원소와 같다고 한다. 김상욱 경희대 교수의 말처럼 ”살아 있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구의 생명이 아무리 많아봤자, 지구에 있는 모래 알갱이와 먼지의 수를 따라갈 수 없듯이. 우리는 아주 잠시 이 ‘특이한’ 상태를 경험하고 다시 우주로 돌아갈 것이다. 중세의 화가가 다시 태어나,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캔버스에 해골을 그리는 대신 우주를 그려 넣지 않을까.
외할머니의 마지막 눈동자가 딱 우주를 닮았었다. 나를 보는 것인지, 나의 너머를 보는 것인지.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는 듯한 눈. 죽음 앞에 오만한 자에게, 그때 그 순간 외할머니의 눈을 마주 보게 하고 싶다. 죽음 앞에 오만한 사회는 삶에 대해서도 오만하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석양에서 모두 각자의 우주를 만났으면 한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우울하거나 감상에 젖는 일만은 아니다. 나의 삶을 감각하는 가장 직설적인 방법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조카가 외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놀고 있다.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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