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떠난 ‘흑인 혼혈’ 야구 감독, 35년 만에 후배들과 인사하다

정상혁 기자 2023. 12. 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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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영도氏 피부색의 아픔 다룬
美 다큐 국내 첫 상영되던 날
1985년 촬영한 부산 대신중학교 야구부 졸업기념 단체 사진. 맨 윗줄 가운데 김영도(원안) 감독이 앉아있다. /김영도 제공

1985년 부산 대신중학교 야구부 졸업 사진. 맨 위쪽 줄 중앙에 확연히 튀는 거구의 남성이 앉아 있다. 피부색과 머리카락에 먼저 눈길이 갈 것이다. 이 학교 야구 감독 김영도(73)씨다. 미군 병사와 한국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이름보다 모진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 남자. 그러나 발군의 기량으로 국내 첫 ‘흑인 혼혈’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 된 남자. 그럼에도 결국 고국을 떠나 기억에서 잊힌 남자.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베이스볼 하모니’가 이달 초 미국에서 개봉됐다.

그리고 지난 21일 대신중에서는 특별한 상영회가 열렸다. 방과후 교실에서 진행된 이 다큐의 국내 첫 공개. 러닝 타임 46분 동안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에 몰두했다. 야구부 허원명(15)군은 “만약 내가 ‘검둥이’ 같은 말을 들었다면 화를 참지 못했을 것 같다”고, 이윤성(15)군은 “피부색이 다르다고 그토록 차별했다는 게 지금 상황에 비춰보면 이해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다큐를 제작한 미국 남네바다주립대 겸임 교수 홍지영(51)씨는 “다문화 연구자로서 각 인종에 울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살갗 벗겨내려 했던 야구 천재

동아대 재학 시절 야구부 선수로 경기에 뛰고 있는 김영도(사진 아래)씨. /김영도 제공

어머니를 ‘아줌마’라고 불러야 했던 소년, 김영도씨는 아홉 살 때 모친과 같이 극장에서 본 영화 제목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낳은 검둥이’였다.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괄시에 눈물 짓던 아이는 피부를 벗겨내려 돌에 살을 비빈다. 김씨도 그랬다. “하얘질까 해서… 근데 아프고 피만 나왔다.” 그해 새아빠가 생기자 김씨는 혼자 집을 나와 부평에 있던 고아원 ‘명성원’으로 들어갔다. 혼혈 고아들이 모여 살던 곳. 차라리 속이 편했다. 거기서 새 이름 ‘영도’를 얻었다.

열세 살 때 야구를 처음 배웠다. 키도 컸고 힘도 셌다. 동대문중 야구부로 진학했고, 동대문상고에서도 4번 타자로 활약했다. 이후 동아대에 스카우트됐다. 그러나 실업팀에는 갈 수가 없었다. 프로 리그가 없던 당시, 실업팀에서는 주중에 회사원으로도 일해야 했다. 사람들이 하도 쳐다봐 가방에 ‘뭘 봐?’라고 써붙이고 다녔던 그의 피부색은 이를테면 결코 은행원이 될 수는 없는 한계를 의미했다. 다큐는 이 같은 김씨의 좌절과 역경을 덤덤히 보여준다. 선수 생활을 포기한 그는 그렇게 중학교 야구 감독에 지원했다.

◇“가족 위해 미련 없이 고국 떠났다”

지난해 다큐멘터리 촬영차 대신중 야구부를 찾아 30여년만에 감독용 배트를 잡아보는 김영도씨. /홍지영 제공

대신중에서 그는 전국소년체전 우승 등으로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이종운(전 롯데자이언츠 감독)·박광율(전 삼성라이온스 선수) 등 여러 제자를 키워냈다. 미국에 거주하는 김영도씨는 다큐 촬영차 지난해 30여 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대신중 야구부에 들러 ‘펑고’를 하고, 교가도 부르며 감회에 젖었다. 김씨는 최근 본지 통화에서 “혼혈인으로 겪은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야구할 때만큼은 얘기가 달랐다”면서 “학생 전체 조례 할 때 큰소리도 치고 대우받으며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신중 측은 지난해 학교를 찾은 김씨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그러나 1987년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서 아시아 혼혈인의 정착을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자 가족을 데리고 미련 없이 비행기를 탔다. 야구라는 꿈, 감독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릴 만큼 단호했다. 한국에서 흔하지 않다는 것은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을 뜻했다. 온 가족이 모욕을 겪는 일도 있었다. 김씨는 “내 아이들만큼은 내가 겪은 차별을 겪어선 안 됐다”고 말했다. MBC청룡 출신 김인식 연천미라클 감독은 “중·고등학교 동창이라 잘 안다”며 “어딜 가나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수군대니 고달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력도 인품도 좋은 친구였어요. 한국 야구에 더 기여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차별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1959년 개봉한 영화 '내가 낳은 검둥이' 한 장면. 정확한 통계에도 잡히지 않은 혼혈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이민을 떠나기 전 김씨는 7년 정도 경상도 지역 혼혈인 모임을 조직해 이끌었다. “서로 의지하려고” 만든 단체였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아마 다들 이민갔을 거예요.” 35년이 지났다. 피부색 다른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는 이제 숱해졌다. 그러나 친숙해졌을 뿐 그들은 여전히 ‘흑형’으로 불린다. 지난 6월에는 동남아 선수를 향해 조롱적 표현을 쓴 프로 축구팀 울산현대 선수들이 징계를 받기도 했다. 대신중 야구부 이진서(14)군은 “할아버지가 텍사스 출신인데 어디 가면 외국인 누구 닮았다고 놀리듯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괜히 움츠러드는 게 있다”면서 “다큐에 나오는 비슷한 경험이 많아 집중해서 봤다”고 말했다.

다음 달 3일에는 김영도씨의 모교 동아대에서도 다큐 상영이 예정돼 있다. 김씨는 말했다. “‘다문화’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세상이죠. 하지만 외국에 나가 소수자 집단으로 살다 보면 알게 됩니다. 차별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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