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의 무노동 무임금 양보 압박, 노사정 탈퇴 카드로 막아

2023. 12. 30.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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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두의 ‘IMF위기 파고를 넘어’ ⑥ 초유의 노사정 대타협 막전 막후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넘어간 후 우리 경제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한국 기업과 자산들이 해외로 싸구려로 팔려나갔다. 중소기업부터 무너졌고 대기업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30대 대그룹 중에 11개 그룹이 해체되었다. 그로 인해 실업자가 넘쳐나고 노숙자들이 서울역 지하도와 서소문 공원 등에 몰려들었다. 서울역 지하도 노숙자들에게 밥 배식 봉사를 나갔다가 젊은 부부가 애기를 데리고 배식 받으러 오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노조측 본질 무관한 말꼬리 잡기 일쑤

1998년1월15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오른쪽 셋째)과 한광옥 위원장(왼쪽 셋째) 등이 노사정위원회 현판식에 참석했다. [중앙포토]
IMF는 노동개혁을 빨리하라고 재촉했다. 1996년말의 노동법 날치기 파문과 노동법 재개정에 따른 후퇴, 그 이후 IMF 관리체제 하에서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등으로 노동 문제는 대단히 풀기 힘든 난제로 남아 있었다. 도심 곳곳에서는 연일 노동자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자율적인 기업구조조정(빅딜) 세부방안을 마련하고 이행하는데 분주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개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사실 기업개혁과 노동개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노동개혁 없이는 제대로 된 기업개혁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98년 1월 15일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현관에서 김대중(DJ) 대통령 당선인과 정부 측 인사, 최종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비롯한 사용자 대표,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과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등 양대 노총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노사정위원회 현판식을 가졌다. 부실금융기관 정리해고 문제로 노동계가 거세게 반발하는 바람에 진통을 겪고 있던 도중에 어렵사리 노사정 협의체가 출범한 것이다. 정부 측에서는 재경원 장관과 노동부 장관이 참여했고 훗날 국회의장을 지낸 정세균 의원 등 여야 의원들도 위원회에 참여했다. 사용자 측에서는 경총의 김창성 회장과 조남홍 부회장, 그리고 전경련을 대표해서 내가 위원으로 들어갔다. 위원장은 한광옥 의원(국민회의 부총재)이 맡았다. 한 의원은 포용력과 함께 뛰어난 친화력을 갖춘 정치인이었다. 밤마다 노조 간부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설득해 나갔다.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협상의 연속이었다. 노조 측에서는 오전 10시에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해 놓고 나오지 않았다. 또 오후 2시에 참석하겠다고 해 놓고 나오지 않고, 다시 오후 4시에 참석하겠다 해 놓고서는 6시가 넘어서야 회의장에 나타나곤 했다. 우리는 아침부터 나가서 노조 대표들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실내에서도 몹시 추웠다. 신사복 차림으로 수 시간을 벌벌 떨고 있으면 노조 대표들이 오리털 잠바를 입고 뒤늦게 나타났다. 젊은 그들은 체력적으로 우리보다 우위에 있었다. 회의 도중에 말실수라도 하면 말꼬리를 잡고 회의 본질과 관계없이 시간을 끌었다.

DJ 당선인 측이 친(親)노동 입장을 보인 까닭에 사용자 측은 항상 수세에 있었다. 많은 것을 양보했다. 그래도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었다. 당시 이 문제에 관한 DJ의 입장은 노동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사용자가 임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되지, 그걸 굳이 법제화할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입장이었다. 만일 DJ가 노동 현장에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았다면 그런 주장을 쉽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노동 현장에서는 갑을 관계가 완전히 바뀌어 사용자가 을이 되고 노조가 갑이 된다. 노조가 물리력으로 파업을 하면 사용자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노조 전임자 임금지불 금지와 불법 파업으로 노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반드시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켰다. 사용자 측에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루는 노사정위 회의장에 DJ 당선인의 경호원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노사협상이 타결 안 되어 뉴욕에서의 채무조정 협상이 잘 안 되고 있으니 그 조항을 양보하라고 설득하러 DJ가 직접 온다는 것이다. 만약 DJ 당선인이 와서 경총의 김창성 회장, 조남홍 부회장과 나를 불러 놓고 “김 회장, 나라가 부도나게 생겼는데 양보를 하시오”라고 하면 김 회장은 기업인이라 당선자 앞에서 강하게 못나가고 “예”라고 대답해 버릴 가능성이 컸다. 회장이 이미 “예”라고 했으니 조 부회장이나 나도 “아니오”라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돼 버린다.

주례사 끝나자 하객석 ‘노사 화합’ 박수

1998년 2월6일 노사장 대타협 공동합의문을 발표한 노사정대표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 왼쪽 둘째가 손병두 당시 전경련 부회장, 오른쪽 셋째가 배석범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이다. [중앙포토]
그래서 내가 조남홍 부회장을 회의장 밖으로 나오게 해서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불사한다는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같이 사퇴 성명서를 작성한 뒤에 한광옥 위원장실로 갔다.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탈퇴 성명서를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 “기자실로 가서 기자 회견을 하겠다”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왔다. 그랬더니 한 위원장이 따라 나와서 “아무튼 다시 내 방으로 가자”고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DJ가 여기로 오지 않도록 설득할테니 나를 믿어 달라”고 했다. 우리는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다시 회의실로 복귀했다.

이런 밀고 당기기를 해 가면서 2월 6일 극적인 타결을 보고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 협약’에 노사정 3자가 합의했다. 끝까지 버티던 민노총의 배석범 위원장이 저녁 늦게 사인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배 위원장은 이튿날 민노총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노사정위 발족 후 6일 후인 1월 21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선언문’에 극적으로 합의한 후 이를 토대로 한 23일 동안의 협상 끝에 드디어 헌정사상 초유의 역사적 노사정 대타협을 도출해 낸 것이다. 이 합의는 뉴욕 외채협상 타결과 국제기구 자금지원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광옥 위원장은 DJ 에게 타결 소식을 전했다. DJ는 크게 기뻐하며 국회 귀빈식당으로 노사정위원 전원을 초청해서 다과를 베풀고 한광옥 위원장과 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자리에는 박태준 자민련 총재, 김용환 비상계획대책위원회 대표도 참석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배석범 민노총 위원장과 나 사이에는 잊지 못할 사연이 한가지 있다. 노사정위원회 합의 후 반년 쯤 지났을 무렵 배석범 민노총 위원장이 딸을 결혼시킬 때 나한테 주례 부탁을 했다. 참으로 의외였다. 회의 석상에서 목청 높이고 얼굴 붉히며 그렇게 격하게 나와 싸웠던 사람이 내게 주례를 부탁하다니….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기꺼이 응하기로 했다. 싸우면서 친해진다고 했던가. 그 때까지 겪어본 배 위원장은 합리적이고 말이 통하는 노조 지도자였고 나는 내심 ‘노조 간부 중에도 이런 분이 있구나’ 생각한 적이 적지 않았다. 결혼식 날 예식장에는 민노총뿐만 아니라 한노총 지도자들도 많이 와서 식장을 꽉 메웠다. 주례 소개가 끝나고 내가 주례석에 서니 하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있었다. 하객석을 메운 노조 간부들에게 나의 주례석 출현은 의외였을 것이다. 나는 차분히 주례사를 마쳤다. 예상치 않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노사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자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26년전 ‘무노동 무임금’ 원칙 하나를 관철하는 것도 그렇게 큰 힘이 들었다. 노동개혁은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고, 개혁이 지체된 댓가를 우리 사회가 치르고 있다. IMF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정치권과 노동계의 협조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경제 문제에 관한한 여야가 합심하여 필요한 법적·제도적 뒷받침을 해주고, 노동계도 노조와 기업이 상생하는 노동개혁에 협조했다면 IMF 위기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국회가 국익보다는 정쟁에 몰입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항상 가슴이 아프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다가 얼마나 정부로부터 핍박을 당했는지 기억할 것이다. 정말 기업인이 신나게 마음껏 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 지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현대가 지난 29년 동안 국내에 공장을 짓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외국 투자가들은 한국의 ‘전투적’ 노조 행태와 정부의 과도한 기업 규제로 투자를 하기 꺼려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과학법’과 같은 친기업 정책을 폄으로서 1년 만에 해외 투자를 1660억 달러(약 214조원) 이상 유치했다는 소식을 더 이상 부러워할 필요 없는 시절이 언제쯤 우리에게 올까.

손병두. 동서투자자문 사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경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강대 총장, KBS 이사장, 호암재단 이사장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상근부회장으로서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절충하며‘빅딜’과 구조조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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