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봤어요” 女납치 순간 밀고했다가…이렇게까지 ‘보복’ 당할줄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시시포스 편]

2023. 12. 3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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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까지 놀려먹는 꾀 가졌으나
결국은 끝없는 형벌의 늪으로
‘부조리’에 굴복하길 바라지만
끝내 저항…‘자유의지’ 새겼다
.
편집자 주
어렵고 헷갈리는, 그럼에도 실생활 곳곳 녹아있어 알아두면 좋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 처음부터 정주행하셔도 좋고, 시즌별로 나눠 봐도 좋고, 각 이야기를 단편처럼 읽으셔도 좋습니다. 걸출한 예술가와 풍부한 예술작품으로 몰입을 돕겠습니다. 각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끝없는 형벌
장 바티스트 그뢰즈, 아이기나에게 찾아온 제우스(일부 확대)
티치아노, '시시포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시시포스는 바위를 밀었다.

제 몸보다 더 큰 돌덩이를 굴렸다. 그는 저 멀리 산 꼭대기를 향해 움직였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불어오는 흙먼지를 대책 없이 들이마셨다. 시시포스는 이따금 바위를 밀며 피를 토했다. 뒤틀린 팔다리가 제자리로 오게끔 몸을 거듭 비틀었다. 그러고는 또 돌덩이를 굴렸다. 하염없이 계속 굴렸다. 시시포스는 종종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짐승 소리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곳에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드넓은 들판과 까마득한 산, 지긋지긋한 돌덩이 말고는 정말 아무런 존재도 없었다. 산 앞에 멈춘 시시포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두 팔로 밀고, 자세를 바꿔 등으로 밀고, 이마저도 힘들 때는 고개를 처박고 정수리로 밀었다. 아예 바위를 등에 업은 채로 힘겹게 한 발씩 언덕을 오르기도 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1488~1576)의 그림 속 시시포스가 그런 모습으로 산을 오르고 있다. 티치아노는 절망적인 상황을 부각하고 싶었는지, 달의 표면 같은 이곳을 매캐한 연기와 불똥으로 채웠다. 시시포스 뒤로는 그가 스러지기만을 기다리는 괴물도 함께 표현했다. 시시포스가 정상에 오르는 건 하세월이었다. 그는 드디어 바위를 끄트머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바위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흔들, 또다시 흔들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산 아래로 맹렬하게 굴러떨어졌다. 데굴데굴 내려가는 돌덩이는 멈출 줄 몰랐다. 모든 장애물을 박살 낼 기세였다. 녀석이 멈춘 곳은 그가 처음 바위를 굴리기에 나선 그 장소였다. 시시포스는 멍하니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너무 허망해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들판으로 내려왔다. 출발점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시시포스는 야속한 그 바위에 다시 손을 댔다. 그리고, 산꼭대기를 향해 재차 돌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이 짓을 벌써 수천수만번째 하고 있었다. 하던 일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신이 내린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교활한 모사꾼

코린토스의 왕이었던 시시포스는 젊어서부터 꾀가 많기로 유명했다.

꾀가 많다는 건 그에 대한 가장 좋은 평가였다. 사실은 교활하고 잔혹한 모사꾼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시시포스의 취미는 코린토스 일대의 나그네를 속여먹는 일이었다. 속임수가 어찌나 고약한지, 그의 노리개가 된 상대가 죽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성격이 그런 만큼, 인간관계도 딱히 좋지 않았다.

특히 시시포스는 그의 형제인 살모네우스와는 원수보다 못한 사이였다. "저놈을 없앨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소." 시시포스는 굳이 델포이 신전까지 찾아가 살모네우스를 죽일 방법을 묻는 인간이었다. "살모네우스의 딸 티로에게서 자식을 얻어라. 그 녀석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사제의 이 말에 굳이 굳이 티로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은 사람이었다. "아이고, 아깝다." 우연히 예언을 알게 된 티로가 제 손으로 두 자식을 죽였을 때 이따위 탄식을 할 수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였다. 시시포스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비상한 머리와 대담한 행동력을 갖췄다. 그런 그는 올림포스 신과의 기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신과의 기싸움
클로드 로랭, '아폴론의 소를 훔치는 헤르메스'. 도둑질의 명수인 헤르메스가 훗날 자기 아들 아우톨리코스에게 도둑질을 알려준다.

첫 상대는 전령과 도둑의 신 헤르메스를 아버지로 둔 아우톨리코스였다.

헤르메스에게 도둑질과 거짓말을 배운 아우톨리코스는 그쪽으로는 당해낼 자가 없었다. 욕심도 많은 그는 허구한 날 인간들의 가축과 보물을 훔쳤다. 아우톨리코스는 그가 손대는 모든 것의 색깔과 모양을 바꿀 수 있었다. 설령 누가 그를 의심해도 이 능력 덕에 걱정할 게 없었다. 헤라클레스가 한때 소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다. 오이칼리아의 왕 에우리스토스가 헤라클레스와 자기 딸 이올레 사이 결혼을 취소했고, 이에 헤라클레스가 왕실의 소를 싹 다 훔쳐 복수했다는 소문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진심으로 억울해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의 말을 믿는 이가 거의 없었다. 사실, 그때도 진짜 범인은 아우톨리코스였다.

그런 아우톨리코스의 눈에 이번에는 시시포스의 탐스러운 소 떼가 보였다.

아우톨리코스는 시시포스의 소를 한두 마리씩 슬금슬금 빼돌렸다. 눈치 빠른 시시포스에게 의심을 받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아우톨리코스는 훔친 소의 색을 바꾸고, 뿔 모양을 달리하고, 그것으로도 불안해 아예 성별까지 바꿔버렸다. 제아무리 교활한 시시포스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오늘도 재미를 보고 돌아왔다. 늘어지게 낮잠을 잔 뒤 기지개를 켰는데, 시시포스가 목에 칼을 대고 있었다. "그간 훔친 내 소를 돌려주시게." 시시포스가 말했다. 아우톨리코스는 기를 쓰고 모른 척했다. 증거를 대라며 시치미를 뚝 뗐다. "저기에 당신이 기르던 소가 한 마리라도 보이오? 장담하는데,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을 거요." 그는 이미 요술을 다 부려놨기에 외려 당당하게 몰아쳤다. 시시포스는 그런 아우톨리코스의 멱살을 잡고 목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 소들의 발굽을 보시오." 웬 뚱딴지같은 말이야…. 아우톨리코스는 소의 발굽을 하나씩 들여다봤다.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다. 그가 훔친 모든 소는 발굽에 '시시포스'라는 이름이 박혀있었다.

주세페 보타니,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난 지혜의 여신 아테나'

"이…. 이건 당신 부하들이 몰래 내 소에 문자를 박은 것 아니오?"

당황한 아우톨리코스가 뒤늦게 받아쳤지만, 이미 기세와 계략에서 모두 진 게임이었다. "그런 잔머리가 있는데도 왜 내가 실컷 훔치도록 놔둔 것이오?" 아우톨리코스가 따졌다. "내게 더 큰 빚을 지게끔 하기 위해서였소." 시시포스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의 아름다운 딸을 주시오. 당신이 내게 저지른 잘못이 큰 만큼, 이런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테요." 그렇게 시시포스는 아우톨리코스의 딸 안티클레이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자 훗날 시시포스를 능가하는 책략가 오디세우스가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아우톨리코스는 시시포스에게 완벽하게 당했다. 생애 첫 굴욕이었다. 그의 아버지 헤르메스 또한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타나토스를 잡다
장 바티스트 그뢰즈, 아이기나에게 찾아온 제우스

어느 날, 시시포스는 거대한 독수리가 강물 깊숙이 꽂히는 걸 봤다.

강의 요정 아이기나를 훅 낚아챈 후 오이노네 섬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까지 목격했다. 시시포스는 이 독수리가 제우스임을 알고 있었다. 난봉꾼 제우스가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 유괴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장 바티스트 그뢰즈(1725~1805)는 독수리로 변한 제우스가 아이기나의 숨겨진 방을 습격한 순간을 그렸다. 매서운 눈매의 독수리가 먹구름과 함께 그녀의 침실로 침투했다. 나체의 아이기나가 이불을 억지로 끌어당기고 있지만, 이를 낚아챈 독수리를 이기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렇게 이 호색한 신의 희생양이 될 처지였다.

루이 장 프랑수아 라그레네, '아이기나와 제우스'

시시포스는 이 광경을 못 본 척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 중의 신 제우스에게 밉보이면 큰일이었다. 그런 그를 한 노인이 붙잡았다. 강의 신 아소포스였다. "코린토스의 왕이시여. 혹시 이 근처에서 내 딸을 본 적이 있소? 분명 그쯤 있었는데, 고개를 한 번 돌린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소." 갑자기 자식을 잃게 된 아소포스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가 덧붙인 마지막 말이 기어코 시시포스를 멈추게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줄 테니, 본 게 있다면 딱 한 마디라도 해주시오." 시시포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코린토스는 땅 대부분이 산악지대라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소." "내가 강을 뚫어주면 되겠소?" "아크로폴리스에 샘물이 솟게 해주시오. 그러면 내가 본 것을 말해주겠소." 시시포스의 말에 아소포스는 곧장 움직였다. 아크로폴리스의 돌 하나에 손가락을 얹었다. 갑자기 화산 터지듯 물이 치솟았다. 시시포스는 그 덕에 국가의 고질병이었던 물 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다. "…큰 독수리가 그녀를 안고 오이노네 섬으로 갔소." 시시포스는 먼 산을 보며 힌트를 다 줬다. 아소포스는 이 말의 뜻을 단박에 간파했다. 그는 곧장 제우스를 찾아가 망신을 줄 수 있었다. 아소포스 또한 제우스가 던진 벼락을 맞고 까맣게 타버리고 말았지만.

야체크 말체프스키, '타나토스'
야체크 말체프스키, '타나토스'(또 다른 버전)

제우스는 시시포스의 고자질에 격분했다.

제우스는 그가 아는 가장 잔혹한 신을 불렀다. 그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밤의 신 닉스의 아들, 검은 날개를 단 죽음의 신 타나토스였다. "시시포스를 잡아 올 수 있겠소?" 타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체크 말체프스키(1858~1929)가 그린 타나토스에서는 언뜻 봐도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어둠의 힘이 느껴진다. 근엄한 표정의 그는 사신의 낫을 어루만지고 있다. 표적의 목을 베기 전 그만의 의식을 행하는 듯도 하다.

프레더릭 레이턴, '알케스티스를 구하기 위해 죽음과 싸우는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가 타나토스를 가볍게 제압하고 있다.

물론 시시포스도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쪼잔한 제우스가 보복하지 않을 리 없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시시포스는 낫과 사슬을 들고 온 살벌한 타나토스를 환대했다. "딱 술 한잔만 하고 가시지요. 이제는 평생 못 먹을 술인데, 한 번만 봐주십시오." 설설 기는 시시포스를 보고 타나토스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제우스는 "그놈이 하는 말을 절대 믿지 말라"고 말했지만, 감히 죽음의 신까지 속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분명 시시포스 혼자 술을 마셨다. 그러다 타나토스가 마주 앉았다. 그렇게 함께 한 잔, 두 잔…. 타나토스의 눈앞에 흐릿해졌다. 정신 차려보니 웬 지하 창고였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가 챙긴 사슬에 자기가 묶여있었다. 이런 설 말고도 시시포스가 너무나 정직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타나토스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몸을 묶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든 망자를 제압해야 하는 타나토스는 힘이 장사였다. 타나토스와 직접 맞서 이긴 상대는 헤라클레스뿐이었다. 그런 신을 평범한 인간이 제압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무섭다는 죽음의 신도 별것 없구먼?" 시시포스가 창고 문을 잠그며 약을 잔뜩 올렸다.

끝내 천수를 누리고
샤를 르 브룅,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이 죽지를 않았다. 몹쓸 병에 걸린 환자는 거친 호흡만 내뱉을 뿐, 숨이 넘어가질 않았다. 창에 찔린 병사는 피만 콸콸 쏟을 뿐, 쓰러지질 않았다. 기력 빠진 노인 중 상당수는 차라리 죽게 해달라며 신전으로 몰려왔다. 가축도 마찬가지였다. 소와 닭, 돼지가 죽지 않으니 모든 골목이 엉망이었다. 하데스가 다스리는 지하 세계도 발걸음이 끊긴 지 오래였다. 모두 타나토스가 역할을 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아들아. 네가 시시포스를 잡아 와야겠다." 제우스가 전쟁의 신 아레스를 호출했다. 아레스 또한 시시포스가 벌인 짓을 못마땅히 보고 있었다. 아무리 전쟁터를 누빈들 누구 하나 죽지를 않으니 영 재미가 없었다. "절대로 녀석에게 현혹되지 말거라."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좋게 말하면 화통한, 나쁘게 말하면 단순 무식한 아레스는 시시포스의 거처를 그냥 불도저처럼 밀어버렸다. 시시포스가 술수를 쓸 틈도 없이 그의 멱살을 휘감아 내동댕이쳤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타나토스를 풀어줬다. 그에게 이 모사꾼을 넘겨 지하 세계로 데려가게 했다. 그렇게 시시포스는 끝내 신들에게 굴복하는 듯했다.

날개를 단 타나토스의 조각(에페이소스 아르테미스 신전의 대리석 조각)

시시포스는 끌려가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하데스 앞에 선 시시포스는 대성통곡을 했다. 하데스가 외려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스틱스강(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존재한다는 강)을 건널 때 뱃삯으로 동전 한 개를 혀 밑에 넣어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 아내는 아무런 도리도 다하지 않았습니다. 원통해서 이대로는 죽을 수 없습니다." 시시포스는 크게 우짖더니,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하데스는 이를 안타깝게 봤다. 씨앗의 신이자 하데스의 부인인 페르세포네도 눈물을 글썽였다. "부디 저에게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시포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직접 아내를 찾아가 복수하고, 스스로 장례를 치른 뒤 돌아오겠습니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그 말을 믿었다. 이들은 시시포스를 풀어줬다. 연신 고개를 숙인 시시포스는 그렇게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슬픔에 젖은 시시포스의 표정은, 햇빛을 받자마자 싹 바뀌었다. "바보들. 나한테 또 속았지?" 그는 이제 입가에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 또한 계획한 일이었다.

시시포스는 언젠가 또 다른 신이 타나토스를 구출하러 올 것을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저승으로 끌려갈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여보." 시시포스가 아내 메로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말고, 뱃삯도 넣지 마시오. 그래야 다시 돌아올 수 있소." 얼마 후 아레스가 찾아왔다. 시시포스는 아레스에게 붙잡힌 그 순간에도 아내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아레스는 그저 신나게 이 인간을 패대기칠 뿐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다시 산 사람이 된 시시포스는 제 수명을 다 누렸다. 그러고 보면, 그는 스스로 장례를 치른 후 언제 돌아가겠다는 시한을 못 박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도 할 말이 없었다. 이쯤 되니 제우스도 실소를 터뜨렸다. 타나토스를 다시 불러 저 녀석을 다시 데려올 수 있을지 물었지만, 이번에는 타나토스가 극구 거절했다. 자신에게 가장 큰 치욕을 안겼던 그 사내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또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굴복 요구에도
조반 바티스타 란제티, '시시포스'

제우스, 하데스, 페르세포네, 아레스, 타나토스, 헤르메스….

굵직한 신들 모두 시시포스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시시포스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그가 자기 수명대로 산 후 죽기만을 기다렸다. 인간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고, 신에게 그 시간은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드디어 시시포스가 생을 마쳤다. 시시포스는 그가 알던 지하 세계로 갈 수 없었다. 시시포스가 내던져진 곳은 산과 들판이 있는 낯선 장소였다. 그 앞에 있는 건 거대한 바위였다. "저걸 굴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의 뒤에는 채찍을 든 복수와 징벌의 여신이 바짝 붙어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산꼭대기에 바위를 올려둬. 그러면 너의 형벌도 끝이야." …고작? 시시포스는 내심 기뻐했다. 고생스럽기는 하겠지만, 못할 일도 아니었다. 시시포스는 바위를 밀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굴려 드디어 산 정상에 올릴 수 있었다. "이제 내 죗값은 끝이군요." 시시포스가 여신에게 당당히 말했다. "글쎄?" 여신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뒤를 봐." 돌아선 시시포스가 본 건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가져다 놓은 이 바위가, 밑도 끝도 없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구르던 이 돌덩이는 어느새 첫 출발점에 가 있었다. "이게 무슨…?" 시시포스는 망연자실했다. 이때 복수의 여신이 그에게 채찍을 내리쳤다. "저걸 굴려." "에?" "멀찍이 떨어진 산꼭대기에 바위를 올려둬. 그러면 너의 형벌도 끝이야." 그녀는 처음 한 말을 반복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프란츠 폰 슈투크, '시시포스'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굴렸다. 바위는 또 데굴데굴 떨어졌다. 시시포스는 그러면 또 내려가 바위를 굴렸다. 굴리고, 또 굴렸다.

시시포스의 온몸은 찢기고 긁힌 상처투성이였다. 머리 위로는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당장 혼절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시포스는 의연해졌다. 채찍을 든 여신이 감시할 필요가 없을 만큼 기민하게 움직였다. 자기 의지대로 돌덩이를 밀었다. 신들은 시시포스가 덧없는 이 일에 절망하길 바랐다.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형벌 앞에 몸과 정신 모두 파괴되길 원했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이들이 바라는 걸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프란츠 폰 슈투크(1863~1928)의 그림 속 시시포스는 그저 바위가 있으니 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우울도, 좌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핏빛 하늘과 메마른 땅이 이 남자를 절망의 늪으로 몰아가려는 듯하지만, 그는 거기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무한한 굴레에 빠진 시시포스는 끝내 굴하지 않았다. 부조리의 형벌 속에서 끝끝내 저항을 택했다. 시시포스의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어느새 얼굴은 웃고 있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로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특별전을 선보이며 지금도 ‘퍼스트 펭귄’으로 도전과 실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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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곳곳에 깔린 부조리, 세상 곳곳에 자리잡은 부조리를 견뎌내시느라 올해도 고생 많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참고 자료〉

일리아스, 호메로스, 아카넷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문학과지성사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민음사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시즌 1 : 프로메테우스〉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2023. 9. 9.)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2023. 9. 23.)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후암동 미술관-데우칼리온 편] (2023. 10. 7.)

〈시즌 2 : 헤라클레스〉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편] (2023. 10. 21.)

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②편]

6)“너, 내 노예가 돼라” 살인죗값 다 치렀는데…이번엔 또 웬 날벼락[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③편]

7)“나랑 3년 노예계약해” 여왕과의 동거…‘강제여장’ 굴욕까지 참았더니[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완결 편]

〈시즌 3 : 테세우스〉

8)미모의 아내 “저 남자 죽여야해요” 남편 현혹…소름 돋는 ‘속마음’은[후암동 미술관-테세우스 편]

〈특별 편〉

9)“제가 봤어요” 女납치 순간 밀고했다가…이렇게까지 ‘보복’ 당할줄은[후암동 미술관-시시포스 편]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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