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가슴 속 빈터에 세운 집
연필 선 몇 개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단순한 모양의 집. 어디선가 본 듯한 이유는 ‘월든(Walden)’의 저자 데이비드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짓고 살았던 작은 오두막에서 모양을 빌려 온 때문이다.
사진가 유지원에게 이 집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유년 시절의 집이다. 가족이 20년도 넘게 살았지만 웬일인지 사진 한 장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집. 꽃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집 마당에서 여러 종류의 꽃을 가꾸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흐릿해져 가듯이, 집도 시간이 지날수록 형체가 지워져서 가슴 속에 빈터를 이루었다.
“어느 날 책에서 월든 호숫가에 지어진 소로우의 오두막을 보았어요. 실제 집은 이미 사라지고 나중에 재현된 집이었는데도 소로우가 살았던 날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게 된 제 어린 시절 기억의 집도 다시 되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사진으로 그때의 감각을 재현하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폭 3m에 길이 4.5m, 높이 2.4m밖에 되지 않던 소로우의 오두막을 그녀는 더 작게 만들었다. 높이 20㎝ 가량의 ‘미니어처’로 만든 것이다. 모형에 불과한 집이지만, 높다랗게 다락방을 만들고 창문을 냈다. 따듯한 파스텔 색감으로 벽과 지붕을 칠했다. 그리고는 이름 없는 산자락과 어두운 호수가, 돌무더기, 풀숲 등 후미지고 허허로운 자연의 장소마다 집을 놓았다. 사진가 유지원의 첫 전시작인 ‘mini.n.ature’ 시리즈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한 장 한 장 사진이 쌓여가자, 가슴 속 오랜 결핍의 빈터에도 집이 지어졌다. 유년의 기억들, 그 속의 온기와 감촉, 귀를 스치던 소리들이 되살아났다. “달빛 아래 벌개미취꽃을 본 적 있니? 얼마나 아름답던지.” 어릴 적 집 마당에서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집이 어두운 길 끝에서 만난 불빛처럼, 집 모양으로 지어진 이야기처럼 서 있는 이유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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