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미소가 혁명적인 이유
김기현 지음
21세기북스
모나리자의 미소. 너무나도 익숙한 이미지다. 16세기엔 혁명적이었다. 개인의 쾌감을 드러내는 게 부적절했기에 초상화 주인공들은 항상 엄숙하고 정숙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온갖 노력 끝에 리자 여사에게서 어렴풋한 미소라도 끌어낼 수 있었다.
다빈치는 왜 미소를 담으려 했을까. 서울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다빈치의 역사적 천재성에도 주목했다. “싹터 오르는 시대의식, 즉 쾌락과 즐거움은 자연이 준 선물이기에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다빈치는 이러한 시대 의식을 한 폭의 그림을 통해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인간다움. 모두 잘 안다고 심상하게 여기는 개념이다. 철학자는 이에 도전한다.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건 공감·이성·자유(자율)라는 재료이고 이중 공감은 문명이 시작되기 전, 아주 오랜 과거에서 형성됐지만 이성과 자율은 한참 나중에 얻어낸 자산이란 것이다. 이성은 기원전 7~8세기경에 씨앗이 뿌려졌고, 자율은 14세기 무렵에서나 싹을 틔웠다는 것이다.
책 속에 펼쳐진,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헬레니즘과 그레코-로만 문명, 중세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종교개혁가 루터, 정치철학자 홉스와 로크 등등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다움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지성사의 인고한 과정으로 탄생한 값진 유산”이란 저자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책의 후반부 기조는 그러나 확연히 다르다. 19세기부터 인간다움이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화론·니체·마르크시즘 등에 의해서다. 근래 인공지능과 생명과학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 앞에 더더욱 위협을 받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종국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죽음을 비용을 들여 제거할 수 있게 된다면, 돈으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과연 공존의 사회가 유지될까. 나의 선택들이 모여 내가 되는데, 인공지능에 선택을 맡기면 나는 누구인가. 저자는 “인간이 점점 로봇을 닮아간다”고까지 말한다. 차이가 있다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내부에 있느냐, 외부 별도 시스템으로 있느냐 정도란 것이다.
디스토피아적인가. 저자는 거부한다.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공감과 이성·자율을 보존하고 나아가 증진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다움』은 그 논의의 출발로 적격이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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