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2000장, 1000명 소개…무기 안 쓴 군인 린뱌오 가장 매력
‘사진과 함께하는 중국 근현대’ 연재 마친 김명호 교수
Q :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몇 회를 예상했나.
A : “오병상 당시 편집국장이 8회 정도 생각했다고 한다. 중앙SUNDAY로선 모험을 한 거다. 내 이름을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데 과감히 필자로 섭외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 나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편지도 쓴 적이 없다. 나 자신 몇 회를 쓰는 문제와 관련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제일 비싸게 산 사진 한 장 3000달러
Q : 한데 어떻게 신문에 글을 쓸, 그것도 연재를 결심했나.
A : “우리나라 신문에 실리는 중국 관련 글을 봤더니 알고 쓰는 게 별로 없었다. 1차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워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직접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Q : 800회는 한국 언론사상 처음이 아닐까 싶다.
A : “책 10권 분량을 이렇게 한 군데에서 길게 한 건 기록일 것이다.”
Q : 시리즈 제목에 ‘사진’이란 말을 가장 먼저 앞세웠다. 이유가 있나.
A : “사진 자체가 하나의 사료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중국 기록을 보니 위문단이 세 번에 걸쳐 방문하는데 한 번에 1700명이 간다. 이중 사진기자가 100여 명이나 된다. 변형되지 않고 캡션이 달린 사진은 훌륭한 1차 사료다.”
Q : 연재 때마다 진귀한 사진이 등장한다. 수천 장을 쓴 것 같다. 어떻게 구했나.
A : “처음엔 한 장씩 쓰다가 나중엔 4장도 썼다. 이제까지 2000장 정도 쓴 것 같다. 사진은 발품을 팔아 구한 것이다. 사진 효과를 위해 원본 필름을 구입했다. 사진 속 배경을 보면서 이게 중국 어느 곳 어느 부문을 찾아야 원본을 구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찾아간다. 한 장에 제일 비싸게 값을 치른 게 3000달러 정도였다.”
Q :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A : “한국전쟁 때 중국에서 전선에 약품을 보내는데 캡슐에 항생제가 아니라 밀가루를 담아 보내다 들킨 사람이 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있는데 선글라스 낀 그 뻔뻔한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Q : 연재의 장수 비결과 관련해 귀한 사진 외 독특하고 해학적인 글이 꼽힌다.
A :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로 특유의 문체 미학을 창출했다고 해 나 자신이 깜짝 놀랐다. 나는 다른 이들의 책을 보면서 20자면 충분한 내용이 40~50자로 쓰이는 걸 많이 봤다. ‘그런데’ ‘~하는데’와 같은 쓸데없는 말이 많다. 나는 되도록이면 형용사·부사·조사 등을 빼 간결하게 쓰려 한다. 루신(魯迅)의 한 작품을 보면 ‘오늘밤은 달이 유난히 밝다. 나는 저 달을 못 본지 20년이 넘는다’는 표현이 있다. 얼마나 간결한가.”
Q : 중국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었나.
A : “대학 다닐 때 중국어 과외를 받았다. 그때 명동에 있던 작은 중국책방에 가 단편 ‘낙엽(落葉)’을 봤다. 그 첫 머리에 ‘흐르는 물에 자신을 의탁해 떠내려가는 낙엽이여’라는 몇 자 안되는 문구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후 중국 문학에 빠져 중국책을 많이 사보게 됐다.”
A : “중국 책을 사러 홍콩삼련(三聯)까지 가게 됐다. 한국에선 삼련을 책방으로만 알고 있는데 중국에선 삼련을 서점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삼련은 1930년대 페이샤오퉁(費孝通) 같은 지식인들이 만든 진보적 언론기관에 해당한다. 생활, 독서, 신지(新知) 3개의 연합이다. 이후 홍콩삼련과 많은 인연이 쌓였고, 그 곳을 통해 리쩌허우(李澤厚·중국 사상가) 등 중국의 많은 문화인들과 친분을 갖게 됐다.” (김명호는 1990년 서울 동숭동에 서울삼련을 열었다가 99년 문을 닫았다.)
Q : 연재에선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많은 인물이 나온다.
A : “800회 동안 약 1000명을 소개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한국 현대문학 말할 때 이광수 타령하는 것과 같다.”
Q : 1000여 명의 인물 중 누가 가장 인상적인가.
A : “린뱌오(林彪)다.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파고 들어갈수록 그렇게 매력 있는 인물이 없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인이건만 평생 무기를 쓴 적이 없다. 한국전쟁 때 미군이 북진해 압록강변까지 접근했을 때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생각이 달랐다. 마오는 중국이 위협받게 됐다고 봤지만, 린뱌오는 언제까지 미국과 등지고 살 거냐 오히려 미국이 중국과 가까워졌으니 대화하기 편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대학원서 늦깎이 사학 공부 재미있어
Q : 연재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뛰어나다. 이런 많은 인재를 가진 중국이 근현대 들어 굴곡진 역사를 갖게 된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A : “중국에서 나오지 않는 물건은 없다고 한다. 온갖 게 다 나오는 곳이 중국이다. 그러나 제일 많이 나오는 것도 없고 품질이 제일 뛰어난 것도 없다. 그냥 골고루 다 나오는 곳이 중국이다.”
Q : 800회 연재엔 중국의 인물과 문화, 역사가 다 담겼다.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중국의 모습은.
A : “중국 문화는 비극미가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인은 인생의 결론은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고난이 있어도 웃자는 게 중국 사람들 생각이다. 마지막회 인물인 공자의 77대 직계 종손 쿵더청(孔德成)이 누이에게 쓴 시 한 구절이 ‘풍우일배주(風雨一杯酒)’다.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한 잔의 술처럼 삼키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Q : 한·중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 양국에 어떤 지혜가 필요한가.
A : “부수고 다시 짓는 것과 리모델링 중 리모델링이 더 힘들다고 한다. 싸우려면 철저히 싸워야 한다. 제대로 싸움을 안 해서 으르렁한다. 마오쩌둥 말 중 싸우다 지치면 친구가 된다는 말이 있다. 제대로 싸우고 나서 만나면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Q : 중국의 속은 정말 알기가 어렵지 않은가.
A : “중국인은 뭐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다. 2019년 베이징 외곽 구베이(古北)에서 한·중·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 적이 있다. 구베이는 우리의 위화도 회군처럼 배신의 땅으로 불린다. 중국 남녀가 구베이에서 만나자고 하면 헤어지자는 뜻이다.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은 회담 장소를 베이징으로 바꿨어야 한다.”
Q :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이 하려면.
A : “중국에 좋은 잡지가 많다. 나는 대륙과 대만, 홍콩 등에서 잡지 열두 가지를 정기 구독한다. 잡지마다 다 특징이 있다. 신문보다도 잡지 참고를 추천한다.”
Q : 중국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많이 했다. 반대로 한국을 중국에 소개한 건 없나.
A : “김영삼 대통령 시절 중국에서 한국 사람의 책을 내고 싶어했다. 처음엔 김 대통령을 생각하고 편집까지 마쳤는데 중국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이 정도 경력의 정치가는 중국에도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중국엔 없고 한국엔 있는 유형의 인물을 찾다가 정주영 현대 회장에 생각이 미쳤다. 정 회장이 고속도로 한 가운데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 있는 사진에 감명을 받았다. 책이 중국에서 나오기 전까지 현대에서도 몰랐다. 나중에 한글판으로도 나왔다.”
Q : 최근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A : “단국대 사학과 대학원 2학기를 마쳤다. 교단에 있을 때와 학생 자리에 있을 때가 완전히 다르다. 세상에 제일 도둑놈이 자기도 모르면서 다른 집 자식 교육하는 건데 내가 대학에서 27년간 있었다. 한데 나도 도둑놈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내가 이렇게 무식한 줄 처음 알았다. 교수들도 학생 자리에 한번쯤 앉아보는 걸 권한다.”
Q : 사학을 다시 공부하는 이유는.
A : “원래 중문과 가려고 했는데 떨어졌다. 기분이 매우 안 좋았는데 떨어지길 잘 했다. 사학 공부가 너무 재밌다.”
Q : 마지막으로 800회 연재를 읽은 독자분께 인사말씀 부탁한다.
A : “글을 쓰면서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쓰고 나면 왜 이걸 빼먹었을까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많았다. 쓸 거리가 생각나면 까먹지 않으려 쪽지에 써 놓곤 했는데, 또 그걸 까먹곤 하는 일이 많았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릴 뿐이다.”
※정리=허정연 기자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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