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먼 강물의 편지
2023. 12. 30. 00:02
먼 강물의 편지
박남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적막』 (창비, 2005)
오래전 살던 집의 욕실 수전. 왼쪽으로 돌리면 온수가, 오른쪽으로 돌리면 시리도록 찬물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손잡이를 중간에 두었다고 해서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찬물이 쏟아졌고 그러다 벼락같이 뜨거운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샤워를 할 때면 ‘춥다 춥다’를 연신 말하다가 뒤로 물러서며 ‘뜨거워’ 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시간도 그렇습니다. 서늘한 슬픔 같은 것들이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니고 분노와 혐오가 서성이고 있는 골목에 머물 때도 있습니다. 물론 문득 기쁨이나 즐거움을 마주칠 때도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빠르게 스쳐 갑니다. 매번 뒤늦게 손을 흔들어 볼 뿐입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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