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질투에 희생, 유대인 작곡가 마이어베어 아시나요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마이어베어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목을 받았던 음악가이다. 20대 초반에 이미 헤센 다름슈타트를 다스린 루트비히 대공의 궁정 음악가가 되었고 베토벤의 ‘교향곡 7번’ 초연에서 팀파니 연주를 맡으면서 베토벤과도 일찌감치 인연을 맺었다. 마이어베어는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작곡가는 자기 또래이면서도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로시니였다. 이때부터 로시니를 롤모델 삼은 그는 오페라를 쓸 때도 로시니 스타일로 썼다.
‘위그노 교도’ 오페라 첫 1000회 이상 공연
8년간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마이어베어는 로시니가 장악하고 있던 파리로 와서 ‘악마 로베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악마 로베르’는 비극적인 출생의 비밀을 가진 주인공이 악마의 계략 속에서 겪게 되는 애끓는 사랑 이야기로, 당시 청중들이 좋아하던 낭만주의적 정서에 딱 맞았다. 공연 내내 선율을 입힌 대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웅장한 합창과 아름다운 발레가 수시로 등장한다. 게다가 프랑스 오페라 최초로 가스 조명을 사용한 화려한 무대장치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장대한 볼거리는 청중들을 압도했다. 덕분에 ‘악마 로베르’는 파리 오페라단 유래 없는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이 놀라운 성공으로 마이어베어는 일약 유럽 오페라계의 새로운 수퍼스타로 부상했으며 당시 유럽에 거세게 불고 있던 로시니 열풍을 일거에 잠재워 버렸다. 사람들은 로시니와 마이어베어의 승부를 기대했으나 로시니가 일찌감치 은퇴를 해버리는 바람에 관심을 모았던 오페라 작곡계의 타이틀 매치는 싱겁게 불발로 끝나버렸다. ‘악마 로베르’가 초연된 이듬해 파리에서는 프랑스 국왕이 마이어베어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하사했고, 그의 고향인 베를린에서는 그를 프로이센 궁정의 악장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마이어베어는 파리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했고, 이 두 도시는 물론 유럽의 모든 극장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가 되어 누구보다 많은 부와 명성을 얻었다.
마이어베어는 그 시대를 지배하던 오페라 작곡의 기풍마저 바꾸었다. 그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청중들은 다른 오페라에서도 그만한 감동과 볼거리를 기대했다. 그러니 온 유럽의 오페라 작곡가들이 마이어베어의 성공 공식을 따라서 할 수밖에. 사실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틀에 박힌 것처럼 뻔해서 모방하는 게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다. 선율이 특별히 창의적인 것도 아니고 화성이나 오케스트레이션이 난해하지도 않았으니까. 모든 것이 흥행을 위해 고안된 것일 뿐 다른 사람이 따라 하지 못할 만큼 독창적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성공의 비결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를 모방한 누구도 마이어베어의 벽을 넘지 못했으니까.
질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했던가. 엄청난 명성과 부를 누리고 있던 마이어베어에게 다른 음악가들로부터 질시와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개성이나 예술성보다 대중성이 인정받는 상황을 싫어했던 순수주의자들일수록 그 공격의 강도가 심했다. 촌철살인의 평론가로 유명했던 슈만은 마이어베어를 “예술성을 타락시키는 음악계의 악마”라고 비난하는 한편 ‘위그노 교도’에 대해 “개신교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드라마가 일상적 축제의 익살극 수준으로 전락했다”며 악평을 했다. 같은 베를린 출신이자 똑같이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도 비난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청중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능숙하게 오려 붙인 음악의 콜라주”일 뿐이라며 날을 세웠다.
나치, 마이어베어 모든 작품 공연 금지시켜
질투는 배신을 낳는 법이다. 바그너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배은망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는데 바그너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마이어베어였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를 지휘하고 현악 앙상블용으로 편곡하면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오페라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다. 성공에 목말랐던 시절 그는 마이어베어를 직접 찾아가 도움을 간청했고 마이어베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충성을 맹세한 비굴한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바그너 최초의 성공작인 ‘마지막 호민관 리엔치’는 물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역시 마이어베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극장에서 공연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늘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마이어베어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을까. 야심에 가득찬 바그너는 은혜를 갚기는커녕 그를 노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기기 힘든 경쟁자여서 미워했고 부와 명예가 많아서 싫었다. 게다가 유대인이어서 더욱 증오했다. 인생의 반전을 노리고 야심 차게 파리 무대에 올린 ‘탄호이저’가 처참한 실패로 끝나자 바그너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배후에 마이어베어가 있다고 우겼다. 마이어베어가 사망하자 그에 대한 바그너의 공격은 도를 넘어서 거칠어졌다. 뒤틀린 콤플렉스에서 시작된 바그너의 이러한 반유대주의 비판은 음악계에서 유대인 증오의 물꼬를 트는 결과를 초래했다. 충실한 절친 테오도르 율리히와 코지마 바그너를 포함한 바그너의 측근과 추종자들이 바그너를 찬양하기 위해 마이어베어와 그의 작품들을 비하하는데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고양되던 독일의 국수적 민족주의와 맞물려 바그너의 인기는 급상승했으나 유대인 마이어베어의 인기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마이어베어가 사라진 후 오페라에서는 바그너와 함께 베르디가 양대 산맥을 이루었고, 곧이어 푸치니와 마스네 같은 스타들이 나오는 바람에 마이어베어는 빠르게 잊혔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해 공연을 금지한 것도 사람들이 그를 잊도록 만드는데 큰 몫을 했다. 단지 성공했다는 이유로 혹은 대중적이라는 것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유대인이라서 매장을 당했던 그의 작품과 인생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20세기 중반부터 마이어베어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의 오페라들도 공연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질투란 열심을 내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맹목적 차별과 무도한 폭력을 낳는다. 그것이 문화계이든 정치계이든. 마이어베어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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