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스파이’ 미 U2기 소련에 피격, 우주 정보수집 씨앗 됐다

2023. 12. 3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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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미·소 U2기 사건
1960년 5월 1일 미 중앙정보국(CIA)이 극비리에 운용하는 U2기가 천둥 같은 굉음을 토하며 파키스탄의 국경도시 페샤와르 기지를 이륙했다. 소련 우주센터가 있는 바이코누르,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이 있는 첼랴빈스크, 미사일 실험장이 있는 플레세츠크를 촬영하고 노르웨이 보되(Bodø) 공군기지에 도착하는 긴 비행이었다. 그런데 첼랴빈스크를 지나 우랄산맥에 이르자 갑자기 소련의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일격을 맞은 U2기는 두 동강 나고, 조종사 게리 파워즈는 낙하산으로 탈출했으나 KGB에 체포됐다. 소련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후련했다.

사실 소련은 U2기 격추를 몇 번 시도했다. 노르웨이 공군기지 직원을 포섭해 U2기의 존재와 항로를 파악했고, 이를 토대로 U2기의 비행 길목인 우랄산맥에서 수차례 미사일을 발사했다. 하지만 U2기의 고도가 높아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사일을 우랄산맥 중에서도 고도가 높은 곳으로 옮겨 사정거리를 확보한 끝에 격추에 성공한 것이다.

미, KGB 감시 피해 하늘로 눈 돌려

흐루쇼프가 격추된 U2기의 잔해물들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아이젠하워 도서관]
CIA는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예정 시각이 지나도록 U2기가 도착하지 않자 분주하게 상황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소련이 격추하지 못하도록 21㎞의 고고도에서 비행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행방을 찾지 못하자 CIA는 플랜B를 준비했다. U2기를 항공우주국(NASA) 소속 기상관측 비행기로, 조종사들은 록히드사 소속인 것처럼 꾸며 국무부가 CIA를 대신해 발표토록 한 것이다. 사건 발생 사흘만인 5월 4일 국무부는 “터키 아다나를 이륙한 기상관측기가 조종사의 산소결핍증으로 실종돼 현재 수색 중”이라고 짤막하게 발표했다. 이렇게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5일 소련 흐루쇼프 서기장이 미국 첩보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해 격추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발표했다. 미국은 당황했지만, 이때까지도 소련이 U2기의 존재를 모른 채 미국 첩보기라고 추측해 발표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은 “흐루쇼프가 격추했다고 한 비행기는 NASA의 기상관측기가 아닌가 싶다. 민간조종사가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 영공을 침범했을 수도 있다”고 시치미를 뗐다. 5월 7일 흐루쇼프가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U2기 잔해와 정밀카메라 등 정찰비행을 입증하는 물증을 들이대며 반박했다. 조종사 파워즈도 나와 CIA 소속임을 자백했다. 그제야 미국도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

이때부터 1960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U2기 논란이 시작됐다. 미국은 거짓 해명으로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외교 공방이 가열되면서 냉전의 골도 더 깊어졌다. 그러나 미국의 정보리더십이 알려지면서 자유 진영의 대미(對美) 신뢰는 더욱 공고해졌다. 국가의 비밀 정보활동 실상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정보활동의 정당성에 관한 공론이 본격화된 것도 정보사적으로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이 사건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내용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초기 U2기 모습. 꼬리(빨간색원)에 ‘NASA 55741’로 위장한 표시가 보인다. [사진 NASA]
무엇보다 U2기 사건은 미국의 집요한 정보리더십을 잘 보여주었다. 냉전 초기 소련이 핵·미사일 능력을 팽창시켜 나가자 미국은 이에 관한 정보수집이 절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5년 소련에 상대국 상공에서 항공정찰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상호 허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무산됐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규모 스파이를 침투시켰다. 그러나 침투한 스파이가 가정부로 위장한 KGB 여성요원에게 발각되는 등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KGB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하늘로 눈을 돌렸다. 특히 소련 방공망을 피하면서 정밀촬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노력했다. 이를 위해 공군과 록히드사, MIT 총장인 제임스 킬리언,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발명한 에드윈 랜드와 수십 차례 논의한 끝에 드디어 1957년 창공의 스파이 U2기를 탄생시켰다. 집요한 노력 끝에 최첨단 정보수집 무기를 개발했다.

미국은 U2기를 서독, 터키, 노르웨이, 파키스탄 등에 배치해 소련의 군사정보를 입체적으로 수집했고, 수집한 정보는 대(對)소련 전략을 흔들림 없이 추진할 수 있게 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당시 일부 언론과 학자들은 소련의 핵·미사일 능력이 미국보다 앞섰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은 U2기를 통해 소련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나라들이 가질 수 없는 소련 군사정보를 우방국에도 제공했다. 냉전 시기 미국이 자유 진영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정보리더십도 큰 몫을 했다.

미국의 정보리더십은 U2기 논란이 본격화되던 5월 1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강단 있는 성명서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아이젠하워는 적의 기습공격을 막기 위해 정보수집은 필수적이며, 특히 미국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당한 경험이 있어 정보수집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소련에 대한 정보수집은 미국과 자유 진영 전체의 안부를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단순한 정치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미국 국민과 우방국에 신뢰와 울림을 주는 정보철학이 담겨 있다. 아이젠하워의 성명은 갈채를 받았고 U2기 피격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U2기 사건과 그 처리 과정에서 1959년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으로 조성된 훈풍 분위기가 날아가 버린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흐루쇼프는 아이젠하워와 캠프데이비드 회담에서 군비 경쟁 일변도에서 벗어나 긴장 완화와 평화 공존에 합의했다. 이어 1960년 5월 16일 파리 정상회담에서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상회담을 통해 냉전의 긴장이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이 와중에 발생한 U2기 사건이 실망스럽기는 했으나, 정상 간 신뢰가 식지 않도록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진정으로 사과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아이젠하워는 사과는커녕 정반대로 갔다. 5월 11일 의회 지도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U2기를 통한 정보수집의 정당성을 오히려 더 강조했다. 흐루쇼프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냥 넘어가자니 U2기의 영공침범을 묵인하는 것이 되고, 강력히 대응하자니 파리 정상회담 파장이 우려됐다. 그래서 파리회담 이전에 아이젠하워가 사과해 주기를 재삼 기대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마저 거부했다. 이에 흐루쇼프도 파리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전격 불참을 선언했다.

상공 정찰, 군사 긴장 완화에 도움

흐루쇼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5월 23일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로 가져가 미국을 맹공했다. 항공기는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어 1대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만큼 U2기의 소련 영공침입은 국제법상 무력공격 행위에 해당한다고 몰아붙였다. 그리고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는 물론 관련자의 법적 처벌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유 진영의 안보를 위한 정당한 조치라며 맞섰다. 국제법 위반 공세에 대해서는 “1956년 헝가리 침공 등 소련의 국제법 위반에는 눈을 감고 어디서 국제법을 운운하냐”며 면박했다. 양국관계가 더 얼어붙었음은 불문가지이다.

제3전선, 정보전쟁
그렇지만 U2기 논란으로 인해 항공 정찰이 위축되거나 후퇴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U2기의 첨단기술이 공개되면서 상공과 우주를 통한 정보수집이 꽃을 피우는 씨앗이 되었다. U2기는 지금도 한반도를 비롯해 전세계 긴장지역을 누비고 있다. 전 세계 570여기의 정찰위성은 모두 U2기의 후손이며 올해 미군에 의해 격추된 중국의 정찰 풍선도 U2기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다. U2기는 다른 나라의 상공정찰을 제도적으로 합법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이나 1992년 영공개방조약(OST)은 군축협정의 이행검증을 위해 다른 나라 영공을 합법적으로 비무장 정찰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는 U2기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U2기는 오늘날 군사 긴장과 군비경쟁 완화에 여러모로 기여하고 있다.

최근 남북한의 정찰위성 발사로 한반도 상공의 정보전이 뜨겁다. 덩달아 군사 긴장도 우상향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상공정찰이 항상 긴장을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사적 투명성을 높여 긴장을 완화할 수도 있다. 남북한도 논란적인 비행금지구역 설정보다 영공개방조약처럼 양쪽 하늘을 모두 여는 역발상은 어떨까? 물론 상황이 조성되면 말이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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