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스파이’ 미 U2기 소련에 피격, 우주 정보수집 씨앗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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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미·소 U2기 사건
1960년 5월 1일 미 중앙정보국(CIA)이 극비리에 운용하는 U2기가 천둥 같은 굉음을 토하며 파키스탄의 국경도시 페샤와르 기지를 이륙했다. 소련 우주센터가 있는 바이코누르,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이 있는 첼랴빈스크, 미사일 실험장이 있는 플레세츠크를 촬영하고 노르웨이 보되(Bodø) 공군기지에 도착하는 긴 비행이었다. 그런데 첼랴빈스크를 지나 우랄산맥에 이르자 갑자기 소련의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일격을 맞은 U2기는 두 동강 나고, 조종사 게리 파워즈는 낙하산으로 탈출했으나 KGB에 체포됐다. 소련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후련했다.
사실 소련은 U2기 격추를 몇 번 시도했다. 노르웨이 공군기지 직원을 포섭해 U2기의 존재와 항로를 파악했고, 이를 토대로 U2기의 비행 길목인 우랄산맥에서 수차례 미사일을 발사했다. 하지만 U2기의 고도가 높아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사일을 우랄산맥 중에서도 고도가 높은 곳으로 옮겨 사정거리를 확보한 끝에 격추에 성공한 것이다.
미, KGB 감시 피해 하늘로 눈 돌려
바로 다음 날인 5월 5일 소련 흐루쇼프 서기장이 미국 첩보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해 격추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발표했다. 미국은 당황했지만, 이때까지도 소련이 U2기의 존재를 모른 채 미국 첩보기라고 추측해 발표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은 “흐루쇼프가 격추했다고 한 비행기는 NASA의 기상관측기가 아닌가 싶다. 민간조종사가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 영공을 침범했을 수도 있다”고 시치미를 뗐다. 5월 7일 흐루쇼프가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U2기 잔해와 정밀카메라 등 정찰비행을 입증하는 물증을 들이대며 반박했다. 조종사 파워즈도 나와 CIA 소속임을 자백했다. 그제야 미국도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
이때부터 1960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U2기 논란이 시작됐다. 미국은 거짓 해명으로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외교 공방이 가열되면서 냉전의 골도 더 깊어졌다. 그러나 미국의 정보리더십이 알려지면서 자유 진영의 대미(對美) 신뢰는 더욱 공고해졌다. 국가의 비밀 정보활동 실상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정보활동의 정당성에 관한 공론이 본격화된 것도 정보사적으로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이 사건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내용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미국은 U2기를 서독, 터키, 노르웨이, 파키스탄 등에 배치해 소련의 군사정보를 입체적으로 수집했고, 수집한 정보는 대(對)소련 전략을 흔들림 없이 추진할 수 있게 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당시 일부 언론과 학자들은 소련의 핵·미사일 능력이 미국보다 앞섰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은 U2기를 통해 소련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나라들이 가질 수 없는 소련 군사정보를 우방국에도 제공했다. 냉전 시기 미국이 자유 진영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정보리더십도 큰 몫을 했다.
미국의 정보리더십은 U2기 논란이 본격화되던 5월 1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강단 있는 성명서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아이젠하워는 적의 기습공격을 막기 위해 정보수집은 필수적이며, 특히 미국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당한 경험이 있어 정보수집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소련에 대한 정보수집은 미국과 자유 진영 전체의 안부를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단순한 정치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미국 국민과 우방국에 신뢰와 울림을 주는 정보철학이 담겨 있다. 아이젠하워의 성명은 갈채를 받았고 U2기 피격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U2기 사건과 그 처리 과정에서 1959년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으로 조성된 훈풍 분위기가 날아가 버린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흐루쇼프는 아이젠하워와 캠프데이비드 회담에서 군비 경쟁 일변도에서 벗어나 긴장 완화와 평화 공존에 합의했다. 이어 1960년 5월 16일 파리 정상회담에서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상회담을 통해 냉전의 긴장이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이 와중에 발생한 U2기 사건이 실망스럽기는 했으나, 정상 간 신뢰가 식지 않도록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진정으로 사과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아이젠하워는 사과는커녕 정반대로 갔다. 5월 11일 의회 지도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U2기를 통한 정보수집의 정당성을 오히려 더 강조했다. 흐루쇼프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냥 넘어가자니 U2기의 영공침범을 묵인하는 것이 되고, 강력히 대응하자니 파리 정상회담 파장이 우려됐다. 그래서 파리회담 이전에 아이젠하워가 사과해 주기를 재삼 기대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마저 거부했다. 이에 흐루쇼프도 파리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전격 불참을 선언했다.
상공 정찰, 군사 긴장 완화에 도움
흐루쇼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5월 23일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로 가져가 미국을 맹공했다. 항공기는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어 1대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만큼 U2기의 소련 영공침입은 국제법상 무력공격 행위에 해당한다고 몰아붙였다. 그리고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는 물론 관련자의 법적 처벌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유 진영의 안보를 위한 정당한 조치라며 맞섰다. 국제법 위반 공세에 대해서는 “1956년 헝가리 침공 등 소련의 국제법 위반에는 눈을 감고 어디서 국제법을 운운하냐”며 면박했다. 양국관계가 더 얼어붙었음은 불문가지이다.
최근 남북한의 정찰위성 발사로 한반도 상공의 정보전이 뜨겁다. 덩달아 군사 긴장도 우상향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상공정찰이 항상 긴장을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사적 투명성을 높여 긴장을 완화할 수도 있다. 남북한도 논란적인 비행금지구역 설정보다 영공개방조약처럼 양쪽 하늘을 모두 여는 역발상은 어떨까? 물론 상황이 조성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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